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착길 Dec 28. 2021

방전


아주 뻐근하게 남은 힘까지 다 써버렸다. 곁의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 사명인 듯 마음을 다해 힘을 끌어 모았다. 내 마음과 몸을 움직인 건 가족의 아픔이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든 낫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은 당연하고 연로하신 부모님도 아프지 않게 하고 싶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여리고 약한 존재들을 보면 온 신경을 쏟게 된다. 


어릴 적부터 작고 여리고 약한 이들을 보면 마음이 쓰였고 그들에게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꿈이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늘 어린 존재들에게 몸과 마음이 향한다. 그들 앞에서는 저절로 마음이 열린다.


한없이 크고 단단해 보이는 어른들도 어느새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시간이 온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그 과정을 지켜봤기에 자연스럽게 체득되었다. 살아오신 역사를 어렴풋이 알았고 부모님께서 극진히 모셨기에 구순을 넘길 때까지 내겐 태산 같은 분이셨. 그런 어른이 점점 기운을 잃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슬픈 일이었다. 


최근에 시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지셨다. 항상 가족을 돌보고 먹이는 데에 시간을 쓰시던 어머니는 정작 자신을 세심히 돌보지 못하고 심하게 아프셨다. 오로지 가족을 위하는 일만 하시던 어머니.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시라고 권해도 집안일에 온 마음을 쓰셨다. 그러시다가 심하게 앓게 되었에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나 역시 아이들을 돌보느라 온 마음을 쓰고 있기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갖기 어렵기만 하기에, 내 몸과 마음을 세심히 살피고 돌보는 일은 늘 뒷전인 엄마이기에, 지금 어머니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껴졌다. 중환자실에서 혼자 떨고 계실 때부터 며칠 더 입원하시다가 퇴원하실 때까지 안절부절못했다. 글도 읽히지 않고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여전히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고 12월은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서 분주하고 정신이 없는데.


꿋꿋하셨던 어머니께서 기운을 잃으시니 마음이 멍해졌다.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친정 엄마의 김장 김치가 오는 날 반찬 몇 가지 더 해서 보내드리는 게 어떨까. 손이 큰 엄마의 김장 김치를 김치 냉장고에 옮겨 담느라 어깨 힘을 다 써버려서 만들어 보낼 반찬의 가짓수가 줄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어머니께 전달이 된 것 같다. 목소리가 전처럼 밝아지셨고 며칠 후엔 손수 만든 음식을 보내주셨다.


엄마가 아프면 누가 밥을 해 주나. 아픈 몸에 딱 맞는 음식을 누가 만들어 주나. 다 나을 때까지 집안일은 누가 책임져 주나. 엄마는 아파도 오래 누워 있지 못한다. 아픈 몸으로 무엇이라도 만들게 된다. 밥을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기운 잃은 자신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고대하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느라 남은 힘까지 다 써버렸다. 아직 몸이 안 좋으신 어머니께 뭐라도 해 드려야 하는데 머리가 멍하니 좋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가끔 들리던 반찬가게에서 반찬 몇 가지를 샀다. 크리스마스날, 산타의 선물을 받고 기쁨으로 충만한 아이들을 앞 세우고 마침 잘 익은 갓파김치와 사두었던 반찬을 들고 시댁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모님 얼굴을 보고 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덩달아 몸도 가벼워진다. 방전된 몸과 마음으로 아이들 겨울 방학을 맞는다. 


마냥 쉬고 싶은 몸과 마음을 아이들도 아는지 살살 눈치를 보면서 요구를 한다. 더 이상 줄 힘이 없다는 걸 느끼는지 한두 가지 정도는 제 할 일을 해준다. 방전  방학이 두려웠지만 닥치고 보니 기우였다. 이번 겨울 방학은 아이들과 함께 널널한 마음으로 평온하게 쉬는 시간을 갖고 싶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 부유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오로라 같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