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전쟁 중 추위가 엄습하자 누구보다 추위를 생생하게 이야기해주던 박완서 선생님 생각이 났다. 책에서 6ㆍ25 전쟁 중 1ㆍ4 후퇴 때의 추위를 표현한 부분을 읽은 날은 그만큼 춥지도 않았는데 뼛속까지 으슬으슬했다. 그즈음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들을 몇 권 읽은 게 섞여서 그런 느낌으로 버무려진 채 지금까지 몸에 남아 있다.
겨울나무처럼 고요히 내 안으로 들어갔던 즈음 선생님 작품을 읽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께서 등단하게 된 첫 작품은 읽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자전적 소설이어서인지 주인공이 선생님인 듯 생생하게 읽혔고 그즈음 출간된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통해 선생님의 생각이나 마음을 알 수 있었는데, 등단 작품인 [나목]을 읽을 생각을 안 하다니. 어린 나이여서 그랬는지 나목이란 제목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져서인지 가장 중요한 작품을 모른 체한 게 지금엔 이해불가다. 독서의 깊이가 투명하게도 얕은 때였다.
박완서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고 아껴서 애틋해하던 작품 [나목]을 이제야 손에 잡아본다. 집안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읽으려니 여간 짬이 안 나온다. 아이들을 보기 힘들어서인지 책을 읽고 싶은데 집중할 수 없어서인지 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잘 넘겨왔는데 아이와 나 사이에서 감정조절이 안 되고 있다. 가진 것 없어도 나만을 책임지던 때엔 오롯이 책 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책과 책 사이를 자유자재로 건너 다닐 수 있었고 이 책의 저자가 소개하는 다른 작가의 책도 만나고 영역을 확장시키는 재미도 있었는데 이젠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을 여유가 없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책 보고 공부하라는가 보다. 정작 자기만 챙기면 될 때엔 그걸 절대 모르지만.
가깝고도 먼 나목들
먼 산자락의 나목들나목...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나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백과사전에서는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라고 한다. 고목과는 다른 나목. 차를 타고 겨울산 옆 도로를 달리면 나무들이 잎을 모두 떨구고 빈 가지 그대로를 드러내고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 멀리서는 까슬하면서도 보송보송한 솜털처럼 보였던, 그 나무들이 나목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 마당가에도 있었고 겨울마다 보았을 그 나무들이 나목이란다. 나이가 들면서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진실해 보였고 고요히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근원으로 내려가 내면을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곁을 지나오면 덩달아 마음은 투명해지고 몸은 단단해진 기분이 들곤 했다. 특히 흰 눈이 소복이 쌓여 나무뿌리를 덮어줄 때의 안락함은 포근한 솜이불을 덮은 듯하다. 나무도 마음 편히 꿈을 꿀 것만 같이. 겨울은 나무가 꿈을 꾸는 계절이다.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꽃 피우고 푸른 잎 터뜨릴 꿈을. 이제 보니 겨울 산이 진정 꿈동산이 아닌가. 그래서 겨울 드라이브를 즐겨했나 보다. 겨울 산자락에 햇살이 비추면 잔가지들이 포근한 솜털처럼 보여서 같이 가던 이들에게도 저기 보라고 하며 신나 한다. 가장 최근까지 나목에 대한 내 마음이 그랬다.
가장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쓴 책이라고 알고서 읽는 [나목]이 벌써 애틋해진다. 항상 소설의 첫 장면을 바로 이해하기엔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니 단숨에 읽고 싶어 진다. 그럴 수 없는 현실이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책 제목이 내가 생각한 나목의 의미와 비슷한지 어떤지 궁금해서 얼른 읽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 읽으면 좋으련만 지금 우리 집은 전쟁 중이다. 바통 터치한 아빠가 너덜너덜 당하는 중이다. 저러다가 아이들보다 먼저 곯아떨어질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와중에 난 추운 겨울날 한 그루 나목이 되어 고요하고 진실하게 내 안으로 나의 근원으로 내려가 더 단단해지고만 싶다. 그러나 우리 집에 자리 잡은 나목의 뿌리 근처엔 개구쟁이 다람쥐들이 겨울잠은 안 자고 온종일 시끌벅적 티격태격 깔깔깔 중이다. 다람쥐 재우려다 나목도 함께 잠들어 버릴 텐데...
도심 속 나목 한 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