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변 Jan 06. 2017

'다름'을 사과해야 하는 사회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까?

얼마 전 시민단체를 통해 한 소년의 소년사건(형사미성년자가 잘못을 했을 때 형사법원 대신 가정법원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맡았다. 소위 다문화가정 아동인데, 외국인-한국인 부부의 아이가 아니라 외국인-외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중도입국자였다. 한국의 인종주의 맥락 하에서 말하자면, 이는 "한국인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는 뜻이다.



단체에서 내 연락처를 구한 보호자가 사무실에 전화를 해 왔다. 우리 아이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화 건 사람이 무슨 일인지 모르니 나도 들어 알 리가 없다. 일단 있는 서류를 모두 들고 내 사무실로 오시라 했다. 일을 하기 때문에 오기 어렵다고 했다. 괜찮다고, 내 쪽에서 기다릴 테니 밤에라도 오시라 했다. 보호자는 법원의 기일통지서, 경찰의 피의자신문조서, 주민등록등본, 아이가 반쯤 쓴 반성문이 담긴 입시학원 연습장을 모아들고 밤에 보다 사무실에 왔다.  


소년은 한국 학교를 다니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외모 때문에 계속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이번에도 다른 학생이 외모를 놀리며 먼저 때리니 자신도 욱하는 마음에 마주 때려 싸움이 붙었다고 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소년의 말을 믿었다. 보호자의 말도 믿었다. 그러나 학교는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후배가 선배한테 먼저 시비를 거는 일이 있을 수 있겠냐고 했다 한다. 이쪽만 가해자가 됐고 학폭위도 열렸다. 피해자는 전치 2주 진단서를 붙여 소년을 경찰에 고소했다. 보호자는 일이 끝난 밤 10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한국의 경찰서에서 아들의 피의자신문에 동석해야 했다.


어떤 문제를 조기에, 작게 해결할 기회조차도 주류/다수 문화의 특권일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처음 서로 치고받고 한 날 저녁에 당장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피해자의 부모에게 가서 허리를 굽혀 사과를 하고 배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피해자의 부모도 마음이 풀려, 형사고소까지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의 보호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다. 문화가 다르다. 피해자가 사는 곳도 이름도 모른다(학교를 통해 알아낸다는 것도 어떤 이들에게는 상당히 고난도 미션이다). 찾아가 사과할 물리적 시간도 없다. 올바른 사과의 말을 구사하기도 어렵다. 혹 피해자가 합의금을 달라고 해도, 돈도 없다.


어떤 문제를 조기에, 작게 해결할 기회조차도 주류/다수 문화의 특권일 수 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특권이다.


나는 보호자에게 소년사건이 무엇이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했다. 담임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고, 전화를 했다. "학폭위 결정문을 좀 보내주시겠어요? ㅇㅇ이가 지금 재판을 받게 됐는데, 기회를 달라는 탄원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보호자에게도 소년을 위한 탄원서와 부모로서의 다짐을 써 달라고 했다.


"한국말...너무 어려워서..."


그는 놀라울 만큼 한국어를 잘 했지만, 그것이 큰 잘못인 양 고개를 숙였다. 모어가 ㅇㅇ어시죠? 그럼 모어로 쓰세요. 쓰신 다음에 그거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실 데 있으세요? 없으면 제가 구해 드릴테니 선생님은 일단 ㅇㅇ어로 쓰세요.


우리는 한 시간 반 걸려 답을 다 쓸 수 있었다.

그는 안도감에 눈이 벌개져 돌아갔다. 나는 소년의 한국인 주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이런저런 서류를 부탁했다. 며칠 뒤 아침,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보호관찰관 면접 질문지에 답을 작성했다. 질문지의 어휘는 한국어가 외국어인 사람들에게 너무 어렵다. 아니, 사실 보호관찰 면접질문이나 형사피고인 의견서 질문 같은 건 보통 한국인한테도 어렵다. 내가 질문을 풀어 설명해 주면 그가 말로 답을 했다. 그러면 나는 그 문장들을 하나씩 또박또박 종이에 썼고, 그는 내 한글을 따라 썼다(말이 글보다 쉬우니 이렇게 하면 외국인들이 한글을 적게 틀리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자기 손으로 써 낼 수 있다). 우리는 한 시간 반 걸려 답을 다 쓸 수 있었다.


그는 수 페이지에 달하는 탄원서도 써 왔다.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한국어 번역문도 가지고 왔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한국에 왔고 어떻게 이 땅에서 아이를 키웠는지, 한국인이되 한국인이 아닌 아이가 학교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키워 왔는지 썼다. 한국말로 쓰라고 했으면 못 썼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 맞는 말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잘못을 했으면 반성을 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아마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이 한국 사회에서, 10대에 법정까지 간 이 소년에게 거듭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부모는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맞는 말이다. 보호해야 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소위 중도입국자녀의 정규교육탈락률은 30%가 넘는다. 중도입국자녀의 고등학교 재학률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한국인처럼 자라나도 한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 이런 현실에서 사춘기 아이를 이만큼 키워낸 부모에게, "애가 잘못 안 하게 잘 키웠어야죠"라고 또 말할 수 있을까? 이 불친절하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서 적응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 하며 살아왔으나 결국은 법원 앞에 선 이 이주민 가족은 어디까지 반성하고 얼마나 더 사과해야 할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사과 중 일부는 그저 '다름'에 대한 것은 아닐까?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까?

작가의 이전글 온라인 명예훼손 2: 가해자인 경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