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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Nov 14. 2018

여덟 살이 외롭다

"여기. 내 앞에. S가 있으면 좋겠다."

"M이 너무 보고 싶어. 친구들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학교 가기 싫다. 재미가 없어. 친구가 없으니까... 친구가 있기는 한데, 말을 많이 못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학교가 재미없어? 새로운 친구들이랑 노는 게 별로야?"

"아니... 학교가 아주 재미없는 건 아닌데, 친구들도 괜찮은데... 마음이... 그냥..."

"마음이 왜 그럴까? 시아를 힘들게 하는 친구가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도 다 못하고, 그냥 놀이터에서 놀기만 해야 되고, 이탈리아에서는 체조 선생님 놀이도 하고, 학교 선생님 놀이도 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하고 싶은 놀이도 못하고..."

"시아가 답답하구나. 친구들이랑 하고 싶은 얘기도 못하고, 이렇게 놀자, 저렇게 놀자 설명도 못하고, 그래서 답답하구나."

"응, 답답해. 그래서 너무너무 친구들이 보고 싶어."

"아빠가, 이겨서 (합격해서) 여기 왔으니까 그건 좋은데, 그래도 나는 이탈리아에서 살면 좋았을 것 같아. 내가 크면 이탈리아로 다시 갈 수 있을까?"

"시아가 크면 이탈리아에 다시 갈 수도 있겠지. 우리가 덴마크로 오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다음에 우리가 또 어디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는 거니까. 시아는 이탈리아로 꼭 가고 싶어?"

"응, 꼭 가고 싶어.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덴마크 학교 다닌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처음부터 놀라울 만큼 적응을 잘하고 학교를 즐거워했다.

시아는 그렇게 아무 탈 없이 덴마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했다.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마음이 힘들고 답답하단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었나 보다.

2주 전부터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활동도 하고 있다. 물론 시아가 원해서 신청했다. 학교 끝나고 두 시간 정도 만들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참가하니, 저도 해보고 싶다고 해서 신청했다.

혹시나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걸까 해서 방과 후 활동을 그만할까도 물어봤다.

"아니야. 학교 가면, 다 놀고 오는 게 더 좋아. 끝나고 만들기 하는 거 재밌어. 학교가 가기 싫은데, 빨리 오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말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공연 끝나고 밤늦게 돌아온 황가수에게 시아가 힘들어한다고 얘기했다.


"시아가 힘들겠지. 나도 어렸을 때 그랬던 것 같아. 이사 가면 친구들 보고 싶고... 그래도 나는 이사 갔어도 친구들이랑 말이 통하니까 새 친구 사귀고 괜찮았는데, 시아는 안 그렇겠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밤이 늦도록 고민했지만 우리는 답을 찾지 못했다.


밤이 늦도록 시아를 생각했다.

그 그리움을 어떻게 하든 사라지게 해주고 싶었다.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지내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없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다른 것들로 덮어버리도록 돕고 싶었다.


나는 내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자라는 걸 참지 못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감정들을 재빠르게 덮어버린다.

아픈 것도 그리운 것도 덮고 누른다. 그게 성숙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야 생활에 충실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사는 방법이다.  

그래서 시아의 외로움에도 그렇게 잠을 못 이룰 만큼 마음이 분주했다.


하지만,

시아가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살아내는 게 나쁠까?

그리운 것이 당연하다. 그리울 때는 그냥 그리워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리움도 사랑이다.


억지로 어색하게 자르고 덮어버린 그리움들은 나를 이내 일상으로 되돌려 놓았지만, 내 사랑을 날카롭고 비뚤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홀대했던 모든 그리움을 떠올리며 결심했다.


그리워하는 시아에게 힘을 내라고, 잊으라고, 애써 새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라고 하지 말자.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살고, 답답함은 답답함으로 살아, 그리움이 녹고 답답함이 부드러워져 시아가 더 자라기를 기대하자.

나보다는 더 부드럽고 너그럽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나보다는 더 풍성한 사랑을 누리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자.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 설렘, 기대가 조금 가라앉은 지금, 그리움이 찾아오기 가장 적절한 때이다.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사람들과 나누었던 사랑에 감사하고, 그 사랑에 그리움을 더해 그 사랑을 더 크게 키우기에 딱 좋은 때가  온 것이다.


러시아에 처음 갔을 때, 새로운 모든 것들이 조금 익숙해지던 날, 잘 덮어 두었던 그리움이라는 것이 불쑥 터져 나와 당황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그 그리움은 내가 만난 그리움 중에 제일 독했던 녀석으로 쉽게 덮어지지도 잘려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연습장을 죽죽 찢어 편지를 썼다.

한참 쓰는 동안, 편지 받는 이의 모습이 생생해 그리움도 외로움도 견딜만한 크기로 작아졌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친구를 마주하고 얘기하고 난 것처럼 후련해져서, 참으로 현란한 러시아어 격변화를 다시 힘차게 외울 수 있었다.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살았던 짧은 기억.


예쁜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사 왔다.

시아가 그리워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을 모두 담아 쓰고 그려 우표를 붙여 이탈리아로 보내기로 했다.


처음 써보는 편지에, 사랑을 글로 담을 일에 부끄러워 볼이 빨갛다.


"친구는 멀리 있어도 없어지는 게 아니야."

"엄마도 E, N, D, B 이모들이 많이 보고 싶지만, 엄마가 러시아에 안 살았고, 다시 이태리에 가지 않았으면 그런 이모들을 다 못 만났겠지. 시아도 이태리 친구들이랑 계속 만나고 편지도 쓰고 전화도 하면서 오래 친구 할 수 있어. 여기서도 아직은 없지만, 나중에 헤어지기 싫어질 좋은 친구  만날 수 있을 거야."


내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잘 깎은 연필로 친구 이름을 꾹꾹 눌러쓰느라 정신이 없다.

편지지를 타고 마음은 이미 M이랑 S랑 학교 앞마당에서 체조 놀이를 하나보다.

내일 같이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또 친구들이 보고 싶은 날, 또 편지를 쓰기로 했다.

매일이라도 쓰자고 했다.


여덟 살의 진한 향수와 그리움이 안쓰럽다.

여덟 살의 향수를 헤집어 자르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그리움의 곁에 서 있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붙든다.


대신 잠든 시아에게 이불을  꼭 끌어 덮어주고


"우리가 친구 해주자. 시아가 친구가 없어서 외로우니까 우리가 친구 해주자."

중년과 여덟 살은 아무리 사랑해도 친구 되기 어렵다는 걸  매일 체험하는 노잼 엄마와 다소 무심한 아빠는 주먹까지 불끈 쥐어가며 결의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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