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영덕 Dec 21. 2022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편입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생들과 함께


1981년 3월, 나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 2학년 학생은 복학생을 포함하여 20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모두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새로운 단체에 들어가는 어색함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위탁 교육을 받으러 온 공군 소위라고 소개를 하니 모두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울대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전광용 교수님의 첫 수업시간이었다. 소설 <꺼삐딴 리>로 잘 알려져 있던 교수님이 두툼한 외투를 입고 들어오시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유명 소설가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 것이 행운처럼 여겨졌다. 마침 교수님은 나의 장인과 동향이어서 나중에 따로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위탁 교육을 받으러 왔다고 했더니 반겨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주셨다.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과 코가 인상적이었다.

전광용 교수님으로부터는 <1950년대 소설>에 대해 배웠다. 교수님은 50년대 소설가 중 한 작가씩 택해서 발표하라고 해서 나는 소설가 서기원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나는 서기원 씨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까지 했었는데, 그는 나를 반기면서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느 날, 전광용 교수님은 나를 또 한 번 감탄케 하였다. 그는 수업시간 중에 “창작을 하고 싶은 학생들은 서라벌 문창과로 가라.”고 하면서, “여기는 창작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을 하는 곳”임을 강조했다. 나는 이때 뜨끔했다. 국문과에 들어왔으니 평소 쓰고 싶었던 시를 써 보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내 주위에는 창작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서울대에 들어오면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학교 성적이었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교수가 되려면 최소 평균학점 3.0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당시 대학은 ‘졸업정원제’라는 제도 때문에 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뽑은 후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졸업을 못 하게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라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우리나라 수재들이 모여 있는 서울대에서 과연 내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로 인해 공군사관학교의 명예가 더럽혀질까 봐 더욱 그랬다. 나는 수업시간에 강의 내용을 열심히 들으며 노트에 적었다. 수업이 없는 쉬는 시간에는 도서관으로 가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예습까지 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우연히 같은 과 학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나는 기껏해야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예습하고 숙제나 하는 정도였는데,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수업과는 상관이 없는 제목조차 처음 보는 책이었다. 나이가 5년이나 아래인 그가 대단한 학식의 소유자처럼 느껴졌다. 이때부터 나는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학생들과 식사도 같이 하고 술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대학이란 스스로 공부하는 곳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학교 수업이란 동기부여 정도의 의미를 지닐 뿐이며, 필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찾아내어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여러 개의 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당시 서울대는 총 142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공 이수 학점은 63학점이었다.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총 180학점을 이수했었다. 군사훈련이나 내무성적 학점을 빼도 140학점 정도 되었다. 그런데 국어국문학과 관련된 전공과목은 하나도 없었다. 

서울대에서는 전공과목 63학점을 이수하고 나머지 학점은 마음에 드는 과목을 수강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다양하게 선택하여 수강했다. 철학, 미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사, 불문학, 영문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니 어려움은 있었으나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과 의도적으로 어울리다 보니 술 마시는 일이 많아졌다. 술이라고 해야 주로 막걸리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학교 근처 식당에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내 생애에 있어서 이때 가장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덕분에 돈도 많이 썼다. 나이도 제일 많았고, 학생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돈을 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때 소위 월급이 12만원 정도였으나 학생들에 비하면 부자인 셈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대학생들이 과외를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그런지 돈이 없어 어렵게 지내는 학생들이 많았다. 물론 비밀과외를 하는 학생도 간혹 있었지만 아주 소수에 불과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들과 함께 막걸리를 기분 좋게 먹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한 학생이 나를 붙들며 근처에 있는 맥줏집에 가자고 했다. 돈이 있냐고 물으니 외상으로 먹자고 했다. 이 학생은 비교적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다. 나는 술 취한 기분에 같이 있던 학생들 여러 명과 함께 맥줏집에 갔다. 

맥줏집에 들어서니 여주인이 반겨주었다. 나는 외상술을 달라고 하는 대신 맥주 한 상자를 가져오라고 호기를 부렸다. 학생들도 여주인도 놀란 눈치였다. 그때 무슨 일로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유쾌하게 술을 마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는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맥줏집에 먼저 가자고 했던 학생이 나에게 다가와서는 학생들이 모두 도망치기로 했으니 형도 빨리 나오라고 했다. 정말이냐고 물으니 정말이라고 하면서 모두 누군가의 하숙집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그 학생과 함께 하숙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나는 큰일 났다 싶어서 다시 그 맥줏집으로 갔다. 내가 들어가니 여주인은 어디에 있었느냐면서 그동안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공기 좀 쐬고 왔다고 하니 여주인은 자초지종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나간 후 학생들이 하나, 둘 없어져서 여주인은 근처 파출소 순경을 불러서 남아 있던 학생들을 잡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한 학생의 아버지가 와서 술값을 모두 계산했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너무 미안해서 피해당한 그 학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 배상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돈은 그의 아버지가 이미 냈으니 술 한 번 더 사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 학생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날 나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기분 좋게 식사하고 술을 마셨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했다. 고등학교 때 재미있게 읽은 나폴레옹 전기와 스땅달의 <<적과흑>>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성공을 향한 나폴레옹과 줄리앙 소렐의 집념은 나의 속물적 본성을 크게 자극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빨리 성공해서 어머니를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게 된 것도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관학교는 내가 생각했던 곳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내가 배운 것은 ‘위국헌신’이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전쟁이 나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목적을 위해 나라가 우리를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4년간 사관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 등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서울대를 다니던 1980년대는 ‘데모’의 시대였다. 당시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정부는 이를 강하게 탄압하며 학생들을 잡아갔다. 어떤 때는 깡패 같은 젊은이들이 학생들과 같이 학교 건물에 들어와서 복도에서 ‘동전 따먹기’ 놀이를 했다.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치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의 돌멩이와 전경의 최루탄이 오고 가는 캠퍼스는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사관생도 시절 막연히 낭만적이리라 생각하였던 대학 축제는 시위대와 전경들의 격전으로 끝났고, 격전 후 대학의 모습은 처참했다. 

서울대에서 공부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학생들의 시위에 관심이 없었다. ‘돈 많은 집 자식들이 팔자가 좋아서 대학 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만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퇴교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 학생들을 보고서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나는 사관학교 출신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용히 공부하다가 졸업하면 충분히 출세할 수 있는 학생들이 잠깐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서 퇴교당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졌기 때문인지 당시에는 형사나 순경이 길에서 행인들의 가방을 검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나 역시 학교 근처 신림동에서 순경에게 검문을 당했다. 그 순경은 체격이 레슬링 선수처럼 좋았다. 그는 나를 붙잡으면서 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내가 자꾸 거부하니까 그는 다짜고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나를 둘러메고 파출소까지 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봐서 창피했지만 다칠까 봐 가만히 있었다. 

파출소에는 마침 파출소장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 장교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항의했다. 내가 공군 중위인데, 저 순경이 막무가내로 내 가방을 조사하려고 해서 거부했더니 나를 둘러메고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그때는 군의 힘이 셌던 때라서 그랬는지 파출소장은 나에게 사과하면서 나를 메고 온 순경을 나무랐다. 

나는 파출소 문을 나서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내 가방에는 당시 유행했던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영역본과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노트가 있었다. 읽어도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 번역하던 중이었다. 당시에는 막스 베버의 책도 ‘막스’라는 이름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루카치’라는 이름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가방 검사를 거부했던 것이다. 

4학년이 되면서 나는 전공 선택 문제로 잠시 고민했다. 국어국문학과에는 크게 국어학, 국문학 두 전공이 있었다. 학부 때에는 전공 구분 없이 모두 배워야 하지만 석사과정부터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느 것을 선택할까 고민했다. 그때 마침 학부 지도교수였던 이기문 교수님이 나에게 국어학을 공부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국어학보다는 국문학을 선호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국어학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마침 나와 나이가 같은 복학생과 그의 여자 친구도 국어학을 공부하겠다고 해서 도서관 연구실에서 같이 공부했다. 교재는 영어로 된 언어학 관련 책이었다. 내용이 좀 어려웠으나 여학생의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이 생겼다. 같이 공부하던 복학생이 과대표가 되었다가 얼마 후 학생 시위 참여죄로 경찰에 의해 잡혀갔다. 그리고 퇴교 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그 여학생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휴학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노동운동을 하러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혼자서 국어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때 한 학생이 같이 문학 공부를 하자고 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재미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문학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공부해야 하는 문학 이론은 모두 외국 이론이었다. 외국어 문제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천천히 해석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이론의 바탕이 된 철학이나 사상이었다. 철학이나 사상서는 원서도 어려웠지만, 번역서도 쉽지 않았다. 국문학을 연구하는 데 꼭 이렇게 외국 이론을 공부해야 하나 싶었으나 당시 학계 분위기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전공 문제를 상의하러 김윤식 교수님을 찾아갔다. 당시 김윤식 교수님은 국문학 분야에서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였다. 연구실에 들어서니 교수님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셨다. 그는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어디 앉으라는 이야기도 없이 이유부터 물으시니 서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으로 교수님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지도 학생 문제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던지 갑자기 화를 내셨다. 학과에서 당신에게는 문제 학생들(시위하다가 수배당한 학생들)만 지도하게 했다는 것이다. 마치 야단을 맞는 듯했다. 학생들이 교수님을 존경하면서도 어려워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연구실 안은 스팀이 잘 나와 꽤 더웠다. 외투를 입고 목도리까지 한 채 30분 이상 서 있었더니 온몸이 다 젖었다. 그런데 내가 나올 때까지도 지도교수가 되어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983년 겨울 어느 아침이었다. 잠이 깨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등이 너무 아파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족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숨이 너무 차서 학생회관에 있는 진료소에 갔다. 증상을 얘기했더니 의사는 가슴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찍은 사진을 보더니 의사는 ‘기흉’이라고 하면서 빨리 입원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기흉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기흉이란 폐에 구멍이 나서 빠져나온 공기가 폐를 압박하여 폐가 쪼그라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석사과정 입학시험 때문에 지금은 입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의사는 기가 찼는지 시험과 목숨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하면서 웃었다. 나는 둘 다 중요하다고 했다.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되려면 반드시 석사과정 시험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서울대 석사과정만 졸업하고도 대학 전임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인지 석사과정 응시 인원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경쟁도 심했다. 당시 나는 영어는 토플 참고서, 불어는 수업시간에 배웠던 교재를 외우다시피 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는 지금 병원에 안 가면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화곡동에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 갔다. 군의관은 진찰해 보더니 기흉이 맞다고 하면서 빨리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시험이 2주 후에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러자 군의관은 임시 처치하면 3일 후에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안심하고 입원하여 시술을 받았다.

퇴원 후 학교에 갔더니 같이 어울렸던 학생들이 석사과정 전공시험 공부를 같이 하자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나를 도와주려는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면서 시험 예상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만들었다. 어떤 학생은 지도교수에게 힌트를 얻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시험 전날에는 한 친구의 집에 모여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작성한 모범 답안을 외웠다. 

다음 날 아침 시험을 봤는데, 전공 시험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영어와 불어 시험도 그런대로 잘 보았는지 석사과정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야 비로소 공군사관학교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학과 사무실 조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윤식 교수님이 나를 지도학생으로 받아주었다는 소식이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모든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전 09화 비행훈련과 예비군 훈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