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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May 08. 2024

인도네시아어 공부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나는 주로 한국어와 한국 문학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다. 그런데 한국 문학 강의는 쉽지 않았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열심히 설명했으나 학생들은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어느 날, 기말시험을 보고 난 후였다. 한 여학생이 한국문학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너무 어려워 눈물을 흘려가며 공부했다고 하면서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열성에 감동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어로 된 한국 문학 교재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 문학사는 내용이 어려운 데다가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한글로만 되어 있는 교재를 구할 수 있어서 그것으로 강의했다. 그래도 학생들은 어려워했다.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재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를 위해서라도 빨리 인도네시아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나는 주로 영어 공부를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객원교수를 선발할 때 요구하는 외국어 능력은 대개 영어 회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와 보니 영어보다는 인도네시아어가 훨씬 많이 필요했다. 나는 학과장 교수에게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겠다고 했다. 학과장 교수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무료로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와 아내는 첫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인 5월 말부터 학교 내에 있는 언어교육원(BIPA)에서 정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학 기간에 특별히 운영하는 속성반이라서 그런지 학습 진도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일반 학기에서 넉 달 동안 가르치는 내용을 두 달 동안에 가르쳐야 하니 진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어를 처음 배우는 우리에게는 이 수업이 정말 힘들었다.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숙제만 했다. 그렇지만 우리와 같은 초보자 몇몇을 제외한 학생들은 입과 전에 미리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듣기 수업이었다. 잘 들리지 않으니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어만 사용하면서 그날그날 나누어 주는 프린트물로 수업을 하였다. 예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열심히 한 덕분에 초급 과정은 무난하게 수료했다.

중급과 고급 과정의 경우 나는 강의를 하면서 인도네시아어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 참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50살이 넘어서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것보다 차라리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1년 코스를 2년 만에 졸업했지만 뿌듯했다.   

어학 과정을 통해 나는 인도네시아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읽어볼 만한 책이나 논문 등도 소개해 주었다.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던 나에게는 강의 내용이 꽤 유익하게 느껴졌다. 

그중 하나는 물건을 살 때 흥정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시장에서는 바가지를 쓰기 쉬우니 흥정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물건 파는 사람이 가격을 제시하면 처음 부른 값의 반 정도 깎아서 흥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75퍼센트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망해서 이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으나 아내는 지금도 웃어가면서 배운 대로 흥정을 잘하고 있다.  

‘슬링꾸(외도)와 폴리가미(일부다처제)’에 대해 학생들에게 토론하도록 하는 수업시간도 재미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부다처제를 용인하고 있다. 첫 번째 부인이 허락하면 모두 4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했다. 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이 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그런지 가르치는 남자 교수는 이를 옹호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 외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인으로 삼아 책임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토론 과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모르는 한인들이 꽤 많다. 개발도상국인 인도네시아의 언어까지 굳이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는 데다가 운전기사와 도우미가 있으니 어지간한 일은 그들이 알아서 도와주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종종 오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한국인 주부가 두 운전 기사에게 “당신은 ‘뿔랑(집으로 가라는 뜻)’하고, 당신은 ‘뿔랑’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두 운전기사 모두 한국어는 모르니까 ‘뿔랑’ 소리만 듣고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종종 섞어서 사용하는 바람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일화를 들고자 한다. 인도네시아에 나보다 먼저 와서 살고 있던 후배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부인해서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후배 부인이 “여기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내세요?”라고 하면서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자신은 인도네시아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환경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가장 심한 스트레스는 집이라고 했다. 비가 새거나 하면 빨리 고쳐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배의 집 주인은 우리의 집 주인이기도 하였다. 집 주인은 인도네시아 육군 3성 장군 출신으로 당시 집을 20여 채 정도 가지고 있어서 집수리를 담당하는 기술자를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기술자가 우리에게 후배 부인은 노상 화를 낸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그러냐면서 웃고 말았는데, 후배 부인이 자주 화를 내며 힘들어 한 것은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언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네시아어 과정 수료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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