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아는 분의 연꽃밭에 놀러 갔다가 직접 재배하신 농작물을 나누어 주셨다. 가지, 호박, 노각이 있었다. 가지는 얇게 잘라 구워 먹으면 될 것 같고, 호박은 쪄먹으면 될 것 같은데 노각? 얘는 손질해본 적도 없다. 안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데쳐야 하는지, 쪄야 하는지, 무쳐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저 아이를 데려가는 순간 노각의 운명이 눈에 그려진다. 냉장고에서 고이고이 구르다가 음식물쓰레기로 쓸쓸하게 버려질 것 같다.
순간 신혼시절 부추 한단이 떠오른다.
신혼 시절 살던 아파트 앞 상가에 어느 날 보니 빵집이 없어지고 슈퍼가 생겼다. 가급적 마트 이용 안 하고 그날 먹거리는 그날 사 먹으면서 가계부도 쓰고 초보주부 놀이에 한참 빠져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가게가 생기니 퍽이나 반가웠다.
신나서 개업 첫날 가봤다. 오이도 팔뚝만 한 것이 3개 1000원이고 파프리카도 싱싱한데 싸고 참 좋았다. 신나게 고르고 계산하려는데 주인아저씨가 개업선물이라며 싱싱한 부추 1단을 주신단다. 싱싱한 부추를 공짜로 주신다니. 이런 횡재가. 하면서 들고 왔는데.
...
나는 부추 가지고 뭘 해본 적이 없는 초보 주부였던 것이다. 게다가 1단이 뭐 이리 양이 많은지. 부추는 원래 1단이 풍성하게 많다. 초보 주부는 부추 1단을 본 적도 없었던 거다.
일단 문제를 회피해보기로 한다. 부추를 일단 냉장고 야채칸에 넣어두고 눈앞에서 치운다. 눈앞에는 안 보이는데 마음이 무겁다. 부추와 함께 내가 같이 시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일단 인터넷에 부추요리 레시피를 찾는다. 화려한 레시피들 중 그나마 내가 해볼 만한 것이 부추전이랑 부추무침이다. 반 단만 일단 꺼내고 또 그중 반은 전용으로 반은 무침용으로 잘랐다. 그런데도 양이 어마어마하다. 부추 기세에 초보 주부는 이미 눌린다. 요리 하나만 해도 진이 빠지는데 레시피 보며 두 가지를 하려고 했더니 식은땀이 줄줄 난다. 내가 왜 공짜 부추를 받아와 이 더운 날에 고생인지 현타가 온다.
그 당시 “살짝 튀긴 새똥”님이라는 절약 블로그를 열심히 봤었더랬다. 그분은 절대 싸다고 필요 없는 것 사 오지 말고 사은품도 받아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필요 없는 것을 가져오는 것은 나에게 “덤”이고 “짐”이며, 그걸 내가 가져오지 않으면 다른 꼭 필요한 사람이 유용하게 쓸 텐데 그 기회를 내가 박탈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 하셨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이 부추 1단을 보고 깨닫는다.
내가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 부추는 요리를 잘하시는 어느 주부 가족의 훌륭한 요리가 되었을 텐데. 어찌 반 단은 해 먹었는데 아직 냉장고엔 반 단이 더 누워있다. 이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도 없고, 하고 싶은 의지도 상실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마음의 짐이다. 부추 한 단으로 또 인생을 배웠더랬다.
노각을 보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보다 훨씬 요리를 잘하는 같이 간 다른 분께 살짝 여쭤본다. 혹시 노각 좋아하시면 제 노각도 가져가실래요? 성격도 좋은 그녀는 안 그래도 노각은 하나로는 무침하기가 애매하다며 기꺼이 받아 가신다. 노각은 박처럼 속의 내용물도 걷어내고 껍질도 벗겨내면 안은 얼마 안 된다고 하신다. 역시 받아 오지 않길 잘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서 고이 썩어서 인생을 마감할 뻔했던 노각은 순간의 선택으로 그녀의 집으로 가 훌륭한 음식이 되었다. 부추는 살리지 못했지만 노각은 살렸다. 어쨌든 조금씩 나아지고 있나 보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