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노각의 운명

일상 에세이


아는 분의 연꽃밭에 놀러 갔다가 직접 재배하신 농작물을 나누어 주셨다. 가지, 호박, 노각이 있었다. 가지는 얇게 잘라 구워 먹으면 될 것 같고, 호박은 쪄먹으면 될 것 같은데 노각? 얘는 손질해본 적도 없다. 안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데쳐야 하는지, 쪄야 하는지, 무쳐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저 아이를 데려가는 순간 노각의 운명이 눈에 그려진다. 냉장고에서 고이고이 구르다가 음식물쓰레기로 쓸쓸하게 버려질 것 같다.

순간 신혼시절 부추 한단이 떠오른다.




신혼 시절 살던 아파트 앞 상가에 어느 날 보니 빵집이 없어지고 슈퍼가 생겼다. 가급적 마트 이용 안 하고 그날 먹거리는 그날 사 먹으면서 가계부도 쓰고 초보주부 놀이에 한참 빠져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가게가 생기니 퍽이나 반가웠다.

신나서 개업 첫날 가봤다. 오이도 팔뚝만 한 것이 3개 1000원이고 파프리카도 싱싱한데 싸고 참 좋았다. 신나게 고르고 계산하려는데 주인아저씨가 개업선물이라며 싱싱한 부추 1단을 주신단다. 싱싱한 부추를 공짜로 주신다니. 이런 횡재가. 하면서 들고 왔는데.


...


나는 부추 가지고 뭘 해본 적이 없는 초보 주부였던 것이다. 게다가 1단이 뭐 이리 양이 많은지. 부추는 원래 1단이 풍성하게 많다. 초보 주부는 부추 1단을 본 적도 없었던 거다.

일단 문제를 회피해보기로 한다. 부추를 일단 냉장고 야채칸에 넣어두고 눈앞에서 치운다. 눈앞에는 안 보이는데 마음이 무겁다. 부추와 함께 내가 같이 시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일단 인터넷에 부추요리 레시피를 찾는다. 화려한 레시피들 중 그나마 내가 해볼 만한 것이 부추전이랑 부추무침이다. 반 단만 일단 꺼내고 또 그중 반은 전용으로 반은 무침용으로 잘랐다. 그런데도 양이 어마어마하다. 부추 기세에 초보 주부는 이미 눌린다. 요리 하나만 해도 진이 빠지는데 레시피 보며 두 가지를 하려고 했더니 식은땀이 줄줄 난다. 내가 왜 공짜 부추를 받아와 이 더운 날에 고생인지 현타가 온다.


그 당시 “살짝 튀긴 새똥”님이라는 절약 블로그를 열심히 봤었더랬다. 그분은 절대 싸다고 필요 없는 것 사 오지 말고 사은품도 받아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필요 없는 것을 가져오는 것은 나에게 “덤”이고 “짐”이며, 그걸 내가 가져오지 않으면 다른 꼭 필요한 사람이 유용하게 쓸 텐데 그 기회를 내가 박탈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 하셨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이 부추 1단을 보고 깨닫는다.

내가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 부추는 요리를 잘하시는 어느 주부 가족의 훌륭한 요리가 되었을 텐데. 어찌 반 단은 해 먹었는데 아직 냉장고엔 반 단이 더 누워있다. 이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도 없고, 하고 싶은 의지도 상실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마음의 짐이다. 부추 한 단으로 또 인생을 배웠더랬다.




노각을 보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보다 훨씬 요리를 잘하는 같이 간 다른 분께 살짝 여쭤본다. 혹시 노각 좋아하시면 제 노각도 가져가실래요? 성격도 좋은 그녀는 안 그래도 노각은 하나로는 무침하기가 애매하다며 기꺼이 받아 가신다. 노각은 박처럼 속의 내용물도 걷어내고 껍질도 벗겨내면 안은 얼마 안 된다고 하신다. 역시 받아 오지 않길 잘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서 고이 썩어서 인생을 마감할 뻔했던 노각은 순간의 선택으로 그녀의 집으로 가 훌륭한 음식이 되었다. 부추는 살리지 못했지만 노각은 살렸다. 어쨌든 조금씩 나아지고 있나 보다. ㅎ



작가의 이전글 우울, 그 오래되고 익숙한 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