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슬기로운 생활
이번엔 꽤 오래 찾아오지 않았다. 원래는 3개월 정도면 흐물흐물 올라오는 감정인데, 이번엔 꽤 오래 버텼다.
마지막이 12월 1일이었으니 8개월 만이다. 오랜만이다.
늘 그렇듯 딱히 원인이 되는 이벤트는 없다. 휴가를 낸지라 점심 모임이 있었다. 유쾌하고 즐거웠다. 반주로 와인을 곁들었고, 몸에 딱히 받는다는 느낌이 아니었는데 분위기상 원하는 양보다 조금 더 마셨다. 속이 조금 좋지 않았다. 휴가라 이모님을 오시지 말라했으므로 유치원에서 온 아이를 맞는다. 아이의 에너지를 받아주기가 자꾸 짜증이 난다. 결국 유튜브에 야구 채널을 틀어주고 방에 가서 눕는다. 자자. 자면 괜찮아지겠지.
잠깐 졸고 일어난다. 취기는 가셨는데 기분은 올라오지 않는다. 또 시작이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익숙한 감정이다.
한참 힘들었던 시절, 심리상담으로도 도저히 답을 못 찾을 시점에 의사인 친구가 알약을 하나 건넸다. "프00”이야. 너무 힘들면 한 알만 먹어. 그래도 안되면 정신과 친구를 소개해줄게. 약품 오남용을 싫어하는 고지식한 나라는 인간은 약은 고이 간직한 채 생애 최초로 정신과 문을 두드려봤다. 온 세상이 바늘이 되어 나를 찌르는 것 같은 어느 날이었다. 지나가다 누가 스치기만 해도 통증이 느껴지면서 짜증으로 치닫았다. 누굴 죽이던지,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어디든 초진은 길고 긴 검사부터 시작한다. 의사가 무당도 아니고, 척 보고 어찌 알겠는가. 치과에 오면 방사선 사진을 찍듯 그렇게 길고 긴 검사지의 작성을 끝낸다. 그리고 면담이 시작된다.
의사는 섣부른 공감을 건네지 않는다. 오히려 단순 명료하게 진단을 내린다. "기질성 우울증". 타고나길 우울한 인간이라는거다. 딱히 원인이 있지 않아도, 성장과정에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지 않아도 기질상 우울한 부분이 크다고 했다. 거기에 환경이 더 해지면 심화될 수 있는 부분이라 했다. 진단은 명료했다. 치료방법도 명료했다. 우울감이 올라오면 그러려니 하고 약을 먹으라는 것.
어찌 보면 차갑고 사무적인 의사의 말투였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굉장히 시원했다. 오랫동안 이해가 안 되던 나에 대해 해법이 나온 것 같았다. 이유는 없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 이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 어디 있는가.
약은 나에게 맞지가 않았다. 기저부는 우울한데 약은 표면부의 에너지만 위로 끌어올리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속아줄 수도 있으련만. 참 나라는 인간은. 그 느낌도 싫었다. 그냥 관리하기로 했다. 나의 우울증을. 고혈압이나 당뇨를 관리하듯 말이다. 심하지 않았으니 가능했겠지.(심한 우울증은 반드시 약물치료가 필요합니다.)
항상 우울감의 시작은 피곤한 상태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최대한 피곤한 상태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 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3개월에 한 번씩은 밀물이 밀려오듯 그렇게 찾아왔다.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럴 때는 딱히 뭘 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침잠해 들어갔다.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그냥 꼬르르르.. 그 우울의 바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침잠해 있다 보면 또 썰물이 나가듯 어느새 물러나버리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울할 때 내 안에서 튀어나오는 자아였다. 같이 글을 쓰시는 분은 내면에 오롯하게 자기 팬인 자아가 있어서 우울해질 때마다 그 아이가 튀어나와 위로를 해준다는데, 나에겐 아주 서슬 퍼런 자아가 하나 있다. 평소에 기분이 좋을 때는 없어진 듯 살다가 이렇게 쳐지면 귀신같이 튀어나와 나를 할퀸다.
"니가 그렇지 뭐. 글 쓰면 뭐라도 될 줄 알았어? 그래 봤자 너는 거기서 거기야. 너 치과 싫으니까 다른 분야로 도피하는 거 아냐?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지. 왜 이것저것 건들여? 글 쓴다고 붕붕 떠서는 그런다고 인생이 바뀔 것 같아?"
...
외면해보기도 했다. 부정해보기도 했다. 싸워보기도 했다. 대체 이 자아는 뭐길래 이렇게 가장 내 편이어야 할 녀석이 누구보다도 심하게 나를 할퀴는 건가. 죽지도 않는다. 글쓰기를 하고, 안정이 되면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김없이 이번에도 나타난다.
그래. 이왕 사라지지도 않을 거 실컷 떠들어보라고 판을 깔아주기로 한다. 이름도 하나 지어 주자. 내 이름 끝 글자 하나 따고 나쁜 뇬이니 "연연"이로 하자. 속마음은 "연년"이로 하고 싶다. ㅎ "연연"아. 그래 더 해봐. 외모 지적도 해봐. 성격 더러운 것도 지적해야지. 왜 남편 잘못 고른 것도 욕해보지 그래.
막상 판을 깔아보니, 은근슬쩍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좀 웃기기도 하다. 연년이 도망갔니? 왜 목소리가 안 들려? 어디 더해보라니까. 갑자기 픽 웃음이 난다. 그렇게 끝도 없이 쳐지더니, 그렇게 끝도 없이 할퀴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우울증과 같이 살아가는 스킬 하나를 더 배웠다.
+1.. 뾰로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