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아빠가 다녀가셨다.
오랫동안 손주를 보지 못하셔서 선물도 줄 겸 아이 얼굴도 볼 겸 들르신다고 하셨다.
종종 내가 출근한 오후에 이렇게 오셔서 아이와 놀아주고 가신다.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못 보던 롤케잌이 보인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할아버지가 사 오셨단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예쁜 롤케잌.
우리 아빠는 이런 걸 사시는 사람이 아닌데
그 빵집에서 제일 좋고 비싼 것을 사서 오셨나 보다..
할아버지는 월남을 하셨다.
지주의 아들이셨다.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목숨이 위험해지자 혼자 월남을 하셨다고 들었다.
부산에서 자리를 잡고 사셨지만
열심히 살아도 살림은 그냥 항상 쪼들렸다 했다.
할머니는 아빠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위의 형, 아빠, 둘이 덩그러니 남았고,
할아버지는 재혼을 하시고 그 밑으로 삼촌이 한 분 계셨다.
할아버지는 기가 엄청 세신 분이었다.
할아버지의 서늘한 눈빛이면 모두들 기를 못 폈다.
아빠의 형님은, 얼굴도 못 본 나의 큰아버지는
그리 갈등이 있었나 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장자가 되셨다.
할아버지의 유일한 집착이 되셨다.
그리고는 흔한 스토리였다.
사법고시 1차를 붙고 2차는 할아버지 돈 사고로 못 친 이야기. 돈 나올 집은 우리 집뿐이라 늘 돈 이야기.
늘 할아버지가 다녀가시면 우리 부모님은 그리도 싸우셨다.
나는 아빠가 싫었다.
할아버지의 허수아비로 엄마를 괴롭히는 아빠가 악의 원흉 같았다.
아빠와 똑같은 눈을 하고는 아빠를 소름돋게 노려보았다.
내가 20살만 되면 저 사람을 안 보고 살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리 생각했던 세월이었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
아빠와 꼭 60년 차이 나게 아빠와 꼭 닮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를 아빠는 지난 세월을,
딸에게 못해준 세월을 보상하듯
그리그리 사랑하신다.
무한정 사랑을 퍼부으신다...
딸이 힘들면 몇 시간 거리라도 와서 아이를 봐주신다.
비가 쏟아지던 아침에도 그랬다.
딸이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던 아침에
몇 시간이 걸려서 오셔서 아이를 봐주셨다.
아빠는 롤케잌을 안 드신다.
롤케잌을 안 드시는 아빠는 무슨 마음으로 롤케잌을 고르셨을까.
다시 태어나면 다시 아빠 딸이고 싶다.
내 아이가 아빠에게 마구 안겨 어리광을 부리듯
그리 다시 아빠에게 안기고 싶다.
롤케잌이 참..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