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고 나서 정리하는 개념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책 서평이 많다 보니 종종 이메일이나 댓글로 신작의 서평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대개 유명 출판사는 자체 SNS를 이용하여 서평단을 모집하고, 작은 규모의 출판사는 이렇게 개별적으로 접촉해서 서평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대개 아직 서평을 잘 쓰지 못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안 그래도 시간이 모자란데 서평 책까지 읽기가 버거워 거절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문해력”과 관련된 책인데, 최근 관심사가 글쓰기, 문해력 등이다 보니 이 책의 서평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계속 불편했다. 책은 아이들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엄마의 태도가 중요하다면서 아이와 함께 문답을 하는 적극적인 독서태도를 주장했다. 그리고 몇 가지 그림책을 제시하면서 그 책에서 질문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물론 이대로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왜 불편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동양고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귀는 참 지독히도 얇아서 어디서 아이에게 [소학]의 구절을 읽어주면 좋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이를 잡고 소학을 구절들을 하나씩 읽어주기 시작했다.
“00아, 육적이라는 사람이 여섯 살 때, 지나가던 높은 장군님이 귤을 주셨대. 장군님은 육적이 귤을 다 먹은 줄 알았는데 육적이 가기 전에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귤이 가슴팍에서 떨어졌대. 왜 귤을 숨겼나 장군님이 물어봤더니, 집에 있는 어머니께 귤을 드리려고 숨겼다고 했대. 어때?”
말을 곰곰이 듣던 아들이 그런다.
“엄마, 귤은 가슴에 넣으면 따뜻해져서 맛없어.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야 맛있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초보 엄마는 전략을 수정한다. 아침에 한 구절씩 소학을 아이 앞에서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 엄마가 뭐하는 짓인지 좀 지켜보던 아들은 어느 날부터 내가 소학을 읽자 자기가 더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 소리 묻히라고 말이다. ㅋ 결국 초보 엄마는 소학을 내려놓았다.
왜 아이는 소학 구절을 들으면서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렀을까? 엄마의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의 “욕심”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편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딱히 나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불편하다. 왜 그럴까? 세상을 보는 제3의 시선을 가진 글벗 중 한 분은 이 차이가 “자연스러움”에 있다 하셨다.
옳거니! 자연스러움.
그럼 왜 자연스럽지 못할까?
욕심이 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잘 보이고 싶고, 잘나 보이고 싶고, 주목받고 싶고 이런 욕심이 내 시야를 가려 부자연스럽게 표출이 되는 것이다. 내가 소학을 읽히겠다는 욕심으로 무장되자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태도가 이상해진 것처럼 말이다. 자연스러움이 몸에 밴 아이들은 귀신같이 안다. 그래서 더욱 거부하는 것이다.
문해력도 좋고, 소학도 좋다.
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언제나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나 그 대상이 자연스러움이 당연한 아이들일 때는 백전백패이다. 두 손을 들어본다. 한 손에 들린 욕심을 내려놓는다. 한 손에 들린 과시를 내려놓는다. 가벼워진 두 손으로 아이를 꼭 안는다. 아이의 숨결과 나의 숨결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그것이 문해력보다, 소학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욕심이 들 때마다 기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