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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느끼다] 내면 아이에게 말을 걸다.

마흔에 관하여 - 정여울 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아이 친구 엄마 사귀기. 1학년 엄마 휴직의 많은 부분이 놀이터 사교활동이다. 다행히도 휴직을 할 수 있었고, 다행히도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었고, 다행히도 아이가 무난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리고 놀이터 어디메에 나도 서있게 되었다. 엄마들은 매우 좋으셨다. 친절하고, 사려 깊고, 배려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함께 해서 좋으면서도 함께 해서 불편했다. 이 불편함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좀 봐야 했다.


아이가 첫 기관 생활을 시작한 4살, 신도시여서 그랬을까. 나만 빼고 모두 전업맘이었다. 튀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병원 이직 후 적응에 눈코 뜰 새 없었음에도 모든 모임에 참여했다. 무리였다. 항상 무리를 하면 탈이 난다. 결국 친했던 아이 엄마와 문제가 생겼다. 흔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곧 이사를 앞두고 있었고, 크게 나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척이나 상처를 받았고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엄마들과의 연락도 끊어버렸다. 무엇이 나를 그리 웅크리게 했을까.






기억의 편린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운동장이었다. 햇살이 요즘처럼 눈부신 그날, 한 아이가 운동장 한 구석에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무리 중 대장처럼 보이는 아이가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는 모습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리의 아이들은 떠났고, 아이는 혼자 남았다.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 일어났다. 터덜터덜 길을 걸어가 집 문 앞 거울에 서서 한참을 눈물 자국을 닦아낸다. 빨개진 눈을 숨기고 싶어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다. 평소보다 밝게 엄마를 부르며 집에 들어간다. 다행이었을까. 엄마는 눈치채지 못한다. 아이는 혼자서 세수를 하며 되뇐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는 괜찮지 않았다. 6학년 시절 그 내면 아이를 따라가다 보니 그 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더 명확하게 보였다. 난 2학기 반장이었다. 학급회의 중에 1학기 반장에게 토론 중 반론을 했고, 1학기 반장 아이는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의아해하던 나에게 1학기 반장이었던 그 친구는 나를 불러내어 힘의 관계를 명확하게 했다. 친구관계에도 힘의 불균형이 있을 수 있음을, 무리에서 내쳐지면 외로워짐을 알았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무리에서 내쳐진 외로움이 너무 오래갔다. 외로웠고 무서웠다.



웅크린 아이에게 다가간다.


아이야 무슨 일이니. 그 친구가 나빴구나. 억울했겠구나. 그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다. 네가 잘못한 일이 아니야. 너는 앞으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난단다. 무리를 이루지 않아도, 무리를 이루어도 너는 사랑받고 사랑하게 될 거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모든 사람이 그 친구처럼 그렇지는 않아.


내면 아이는 발개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발그레 웃는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앞으로 사랑받으며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말이지? 다시 일어나 걷는 아이의 뒷모습이 아까처럼 쓸쓸하지 않다.




내면 아이와의 만남에서 주도적으로 말을 걸어야 하는 쪽은 성인이 된 나 자신이다.

내면 아이는 뜻하지 않는 순간 오래된 트라우마의 형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뿐, 자신이 나서서 직접 행동할 수가 없다. 성인 자아가 먼저 말을 걸어주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깨닫게 된 것들을 이야기해주면, 내면 아이는 비로소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래오래 숨겨두기만 했던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여주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상처가 고개를 드는 순간, 내면 아이가 제발 나를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순간은 분명 위기이지만 ‘내 안의 진짜 내 모습’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상처의 처절한 양면성을 조금 알 것 같다. 상처를 꺼내보며 대면하는 순간은 미칠 듯이 고통스럽지만, 상처를 꺼내보는 순간 내 안에서 ‘그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커다란 힘’도 함께 나온다는 것을.
- [마흔에 관하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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