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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느끼다] 엄마와 전복죽

H마트에서 울다 - 미셀 자우너 저


사람에게서 가장 늦게 바뀌는 것이 뭘까?

언어? 문화? 식성?


어느 한 연구에 따르면 이민자의 3세대가 지나야 비로소 그 지역의 식성으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언어는 한 세대가 걸리지 않고, 문화도 한 세대 정도가 지나면 그 나라 사람처럼 되는데 식성이란 그렇게 오래도록 무섭게 깊게 한 사람에 남아있다.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는 소위 검은 머리 외국인이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마치 고향을 맛을 찾은 것처럼 할 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이 책 [H마트에서 울다]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10대 시절 살던 미국 미주리주의 작은 도시 콜롬비아 시티에는 h 마트가 들어설 만큼의 한인도, 동양인도 없었기에 “한인장”이라고 불리던 작은 슈퍼마켓이 한인들의 구심점이었다.

엄마는 미국 사는 2년 내내 최소 3일에 한 번씩은 그 슈퍼에 들렀다. 매일 피자와 햄버거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10대였던 나는 대체 왜 그리도 미국까지 와서 한식을 해주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하루에 한 끼라도 밥을 안 먹으면 속이 느글거린다 했다.


20여 년이 흘러, 30대 중반의 아이 엄마가 된 내가 다시 미국을 찾았을 때 나는 h 마트의 단골이 되고 말았다. H마트가 있는 대도시에 살아서 다행이야. 한 끼라도 밥을 안먹으면 속이 느글거려. 엄마가 했던 말 그대로 따라 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요리를 지독히도 싫어하고, 재주도 없는 내가 미국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 h 마트에서 장을 봐와서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쳤다. 다진 마늘은 늘 떨어지면 안 된다는 걸 새삼 알았고, 스리랏차 소스 옆에 국적 불명의 tofu를 만지작거리다 풀무 0의 뽀얀 두부를 만나면 그저 반가웠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 안을 만큼”의 뜻이다. 한국에서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은 고국에서 먹던 갖가지 인스턴트 라면을 사러, 한인 가족들은 설날에 해 먹을 떡국 떡을 사러 이곳에 온다.


큼직한 통에 담긴 깐 마늘도 여기서만 살 수 있다. 한국 음식을 해 먹는 데 마늘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이것뿐이라는 말이다.


[H마트에서 울다] 서문 중




우리가 찾는 것은 트레이더 조 매장에는 없다. H마트는 아무데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여기서는 반드시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향기로운 공간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내내 반사적으로 나오는 나의 엄마의 모습과 어린아이였던 내가 듣고 싶었던 모습 그 두 가지의 싸움이었다. 넘어졌을 때 나는 “괜찮니?”를 먼저 듣고 싶었다. “그러게 엄마가 뛰지 말라고 했지!”라는 말 전에.. 울고 있을 때 나는 “우리 딸이 슬프구나.”를 듣고 싶었다. “뭐가 슬프다고 울어! 엄마가 죽었냐” 대신에 말이다.


아이에게는 내가 듣고 싶었던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심호흡이 최소한 세 번은 필요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인 저런 말들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책의 주인공 어머니처럼 우리 엄마도 원하는 말투로 얼러주지는 못했다. 그들의 엄마에게 받은 방식은 그 한 가지뿐이었기에 그렇게 또 대물림되었지만 그녀들이 아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한 가지는 바로 “음식”이었다.


내가 아프면 엄마는 걱정의 표현인 온갖 날 선 말들로 나를 타박한다. 그러게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했지 않느냐. 밥을 제대로 안 챙겨 먹으니 그 지경이지. 네가 맘씨를 곱게 안 쓰니 맨날 두통이 있는 거다 등등. 이제 정말 엄마 말은 지긋지긋해서 내가 알아서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쯤 보글보글 끓여서 가져다주는 음식.


전복죽이다.


죽을 싫어하고 시판 죽은 더더욱 싫어하는데 아플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참기름 냄새가 고소한 내장을 듬뿍 넣고 전복을 크게 썰어 전복의 씹는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엄마표 전복죽이다. 어머님도 음식을 잘하시고 어머님 음식도 맛있지만 이상하게도 엄마 음식에서 느끼는 그 한 숟갈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소한 전복죽을 한 입 넣는 순간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온기는 음식이 입안의 만족만을 존재하는 것은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 미셀은 엄마가 돌아가신 뒤 엄마 음식의 향수를 찾아 h마트에 가고 그곳에서 엄마의 자취를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에게 남은 건 더 이상 엄마의 모진 말도, 엄마와의 끝도 나지 않을 것 같은 갈등도, 엄마의 투병생활도 아니다. 한국인 엄마를 두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수많은 한국 재료들 사이에 엄마의 온기…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엄마의 기억이다.


먼 훗날, 엄마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전복죽에 참기름을 듬뿍 넣으며 엄마를 그리워하게 될까. 상상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 그 시간이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엄마가 말했다.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야."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다른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데리고 나타난 특이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낳아 키우고 나와 18년을 한 집에서 살았던, 내 반쪽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H마트에서 울다] 중



이것이 내가 원한 전부였다.

몇 날 며칠을 화려하고 값비싼 고기 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합을 달리 한 갖가지 감자 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걸.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게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나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는, 보드라운 죽이 엄마의 갈라진 혀를 살포시 감싸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따뜻한 액체가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뒷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H마트에서 울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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