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책을 느끼다] 어른, 그 허상에 대하여

데미안

병원 독서모임으로 멤버들과 [데미안]을 읽고 의견을 나누었다. 리더인 나만 30대 후반이고, 다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그야말로 MZ 세대들이다. 처음 모임부터 이 모임은 독서모임이니 계급장 다 떼고 하자고 했는데 역시 그들은 거침이 없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단톡방의 내 카톡은 씹히기 일쑤이고, 첫 모임에는 내가 고른 책의 제목을 보고 “이게 뭐야?” 했다는 얘기를 거침없이 한다. (첫 모임 책은 한근태 작가님의 [고수의 독서법]이었다.ㅋㅋ)


[데미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각자의 사춘기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사춘기는 꼭 10대 시절이 아니라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니, 먼저 내가 20대 시절 방황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하나둘씩 이야기를 쏟아낸다. 아주 얌전한 성격의 한 분은 무시무시한 중2를 보냈다며, 아직도 어머니는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뛴다고 하신다 했다. 어떤 분은 나는 데미안도 크로머도 아니었지만 방관자였다면서, 이 책을 보며 방관자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어떤 분은 공부도 놀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것도 놓지 못하고, 저것도 놓지 못하며 쓸데없이 너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며 그 시절이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그 시절 나에게 데미안 같은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른. 어른의 사전적 정의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다 자란 사람”이라는 것은 뭘까? 언제가 되면 우린 다 자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뿐 아니라 우리는 모두 “어른”을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사춘기 시절뿐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은 “어른”을 찾아 헤매고 있다. 자기 계발서를 찾아보고, 자기 계발 강의를 듣고 그런 스타강사에 팬층이 두텁게 형성되는 것은 이상한 형상은 아니다. 그들로부터 동기부여를 받고, 그에 대한 페이를 지급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눈을 감아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갤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갤 거라고 “



어른들의 성장동화 같았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제곡인 [어른]의 가사이다. 사춘기 시절 아이들도 그렇고, 사전적 정의 상 “어른”이 된 우리들도 듣고 싶은 이야기이다. 주기적으로 자기계발을 찾아 헤매고, 가끔은 점이나 사주를 보러 가는 것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런데 소위 이 시대의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들도 모든 것을 다 알까? 나의 고민, 방황을 다 해결해줄 수 있을까. 가끔씩 누군가를 신성시하거나 너무 포장하는 것을 볼 때 단전에서부터 거부감이 올라온다. 종합병원의 치과에 있다 보니 종종 개인병원의 의사 선생님과 갈등을 겪고 오시는 환자를 많이 만난다. “역시 개인 치과는 못 가겠어요. 교수님 말만 믿을래요.”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긴장한다. 저도 틀릴 수 있어요. 저도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에요. 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뿐이다.


나는 나의 첫 책이 빨리 나오길 바라기도 하고,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지식 책의 특성상 아는 체를 해야 하기 마련인데, 그 사실이 오글거리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 그래도 누군가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책일 것이야. 애써 위로해보지만 부끄러운 것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내가 책을 내는 것을 아는 블로그 어떤 분이 책을 내고 나면 그 책의 저자에 대해 환상을 가진 환자들이 와서 힘들 수도 있을 것이에요.라고 댓글을 주셨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책으로 소아치과 진료실에 일어나는 일들을 나의 시선으로 담은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기존에 써둔 원고를 거의 수정했다. 나는 이렇게 인간적인 시선을 가진 공감능력이 좋은 의사예요. 포장하는 글은 쓰고 싶지도 않고,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좋은 의사이자 사람이고 싶어 “노력하는 중”일뿐이지 늘 좋은 의사도, 늘 좋은 사람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여러 면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여러 면이 있다. 때로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힘들게도 느껴지는, 그렇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한낱 인간일 뿐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이라고 불리는 분들도 그렇지 않을까. 여러 경험과 노력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었지만 그뿐, 그들도 불완전하지만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독서모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어른이 된 당신이 그 사춘기 당시의 본인에게 돌아가면 뭐라고 해줄 것 같냐고.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 다들 한참 고민을 했다. 그냥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 것 같아요. 응원해줄 것 같아요. 그리고 넌 잘 헤쳐왔다고 말해줄래요.


그렇다. 그들은 “데미안”같은 어른의 존재가 없어도 그 시절을 스스로 잘 헤쳐왔다. 무서운 중 2병이 들어서 온갖 일탈을 일삼았던 그녀는 그렇게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독하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했다. 방관자였던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그녀는 지금은 어디에서도 방관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분주하게 보냈다는 분은 그렇게 분주했기에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빨리 찾은 것 같다고 했다.

 헤르멘 헤세가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데미안”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조금은 덜 휘둘리지 않을까.

이전 09화 [책을 느끼다] 내면 아이에게 말을 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