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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있습니다] 책과 술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나름의 의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제대로 즐기기 위해 요리조리 노력을 한다고 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일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제 남편은 그토록 "먹는 행위"에 진심입니다. 그래서 반찬과 밥의 조화와 순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들은 몰라도 말입니다. 화를 웬만해서는 내지 않는 그가 마지막 한 숟가락의 반찬과 밥, 그리고 한 모금의 술을 남겨둔 채로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그 술을 홀라당 마셔버리면 인생에서 가장 분노에 찬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읽기에 진심입니다.

아니 어쩌면 술에도  진심입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메뉴를 고를 때는 "아무거나" 이야기하지만, 술을 고를 때는 눈빛이 또렷해지며 원하는 주종을 말합니다. 오늘은 하이볼이 좋겠어. 또는 오늘은 와인으로 가자고.



맥주는 모임에서는 대체로 선택되지 않습니다. 제게 맥주란 음식과 함께 하기에는 너무 존재감이 큰 술입니다. 반주의 매력이란 음식 소화를 도우며 음식의 위치를 헤치지 않으며 존재해야 하는데 맥주는 음식이 들어가기도 전에 위장의 부피를 너무 많이 차지해버리거든요.

그러기에 맥주는 단독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곁들임이 아니라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맥주가 존재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는 바로 무덥게 찌는 여름날 집에 와서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맥주를  여는 순간. 바로  자리입니다. 어떤 곁들임도 필요 없습니다. 맥주.  자체로 존재감이 확실한 거죠.



책도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환경은 그 책을 위해 거들뿐. 상황상 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잘 읽기 위해 주변 환경은 거들뿐입니다.

[사피엔스]로 대표되는 유발 하라리의 책이 대표적인 존재감이 큰 책입니다. 처음 유발 하라리를 만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보다 농경사회가 훨씬 더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글에서 만났을 때 한여름날 샤워 후 맥주캔을 땄을 때의 청량감이 느껴졌다면 좀 과할까요? ㅎㅎ


상황이 책을 불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은 독립서점이나 북까페에서 평소에는 잘 선택하지 않은 소설이나 에세이 등을 골랐는데 매우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은 바나 이자까야에서 추천해 따라먹은 술이 아주 좋았던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한수희 작가님의 [온전히 나답게]는 그렇게 만나서 제 인생 책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상황별 독서도 책을 신중하게 고르는 편입니다. 특히 장기간 이동을 해야 하는 여행을 떠날 때는 매우 신중해집니다. 주로 계절과  시점의  감정이 선택의 기반이 됩니다. 폭설이 쏟아지던 작년 평창여행에서는 법정스님의 [스스로 행복하라] 골랐고,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에서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골랐습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주의 여행에는 허지웅 님의 [최소한의 이웃] 함께 했었네요. 여행의 감성과 분위기를 배가시킨 책을 만나 생각의 향연이 펼쳐지는 날에는 음식과 페어링이 완벽하게  와인을 머금은 뒤의 황홀경이 펼쳐집니다. .  맛에 사는 거지 ㅎㅎ




역시 오늘의  유혹을 이길  있는  
그나마도 어제 마신  밖에 없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아무튼 , ] 김혼비 




구절을 보고 술을 책으로 바꾸고 싶으면서 매일 술을 마시는  그래도  부담된다 느끼는 저는 아마도 술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봅니다.^^




역시 오늘의  유혹을 이길  있는  
그나마도 어제 읽은  밖에 없다.
오늘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제 읽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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