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나를 정의할 수 없다
빈 상자가 두 개 있습니다. A상자는 책으로 가득 차있고 B상자는 속이 텅 비어있습니다. 먼저 A상자를 딛고 서봅니다. 나도 상자도 멀쩡합니다. B상자를 딛고 서볼까요. 무게를 싣자마자 상자가 폭삭 주저 않습니다. 빈 상자가 당신의 마음이라면, 무엇을 채우겠습니까? 마음 상자가 위태로울 때 공허한 마음을 메워줄수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2020 Sydney Book Curation
최근 1년간 가장 기억에 남은 소설을 꼽아보면, 단연코 김세희 작가의 『 드림팀 』이다. 소설의 완성도, 표현력, 구성력의의 우수함은 말할 것도 없고 (신동엽 문학상을 받은 김세희 작가 아닌가!) 무엇보다 핍진성이 뛰어났다. 내가 사회 초년생 때 겪었던 인물,사건,상황... 거의 극사실주의였다. 설마 소설 쓰기 전에 절 취재하셨나요? 물어보고 싶을 정도.
그녀는 선화가 달라진 걸 느꼈고, 업계 젊은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더니 바람이 들었다고 했다. 다들 처음에 뽑으면 열심히 하겠다고, 평생 다닐 것처럼 그러지. 좀 지나면 똑같아지더라. 선화는 점점 그녀를 차갑게 대했다. 그럴수록 출근해서 책상에 먹을 것이 놓여있으면 불편했고 오후까지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게 더 나빠. 차라리 한가지만 하라고. 선화는 생각했다. 악역을 할거면 악역만 해. 죄책감 없이 미워할 수 있게.
- 김세희,『 드림팀 』
나의 '그녀'는 30대 초반 대리 E였다. 당시 나와 사수A는 기획업무를 했고, 그녀와 내 동기는 재무업무를 했는데 그녀는 나와 업무롤이 겹치지 않는 데도 항상 나를 찾았다. 기획 / 재무 업무 외에 갑자기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본인의 부사수가 있음에도 나를 데리고 일을 하고 싶어했다. 결국 부장은 E의 성화에 못이겨 날 그녀 밑으로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E가 날 좋아해서, 인정해서라고 생각했다.
E는 나와 일하게 되는 첫날 이렇게 말했다. "영업에서 널 안데려 가려고 해서 넌 이 기획부서에 왔고, 신입 셋중에 니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 내가 데려가는 거야." 자신이 권위를 확인시키고, 나의 자존감을 깎았다. 지금 같았으면 책상을 박차고 나왔을테지만 초년생이라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를 몰랐다.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지켜봤다.
E는 밤에 대학원을 간다는 이유로 자신의 업무(7년차인 그녀와 2년차인 나 사이에 업무 난이도를 무시하고)를 나에게 다 떠넘겼다. 억울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매뉴얼을 찾고 타본부 선배들에게 혼나가면서 일을 했다. 부장에게 보고를 하다가 질문이 들어오면, E는 자기 업무롤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내 등을 떠밀었다. "니가 설명해." 고작 2년 차인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연차에 비해 큰 일이 맡겨졌다고 생각했다.
근데 E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입고 오는 옷, 전화받을 때 말투, 점심시간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콘트롤 하려했다. 대부분의 지시는 '자신과 함께, 자신처럼' 하라는 거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과거 인기CF였던 불량감자에 나온 개그맨을 닮았다. 도저히 따라하고 싶지 않았다. E의 말을 들은체 만체하며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괜히 트집을 잡고 폭언을 했다. 아래 대사처럼.
"넌 약해, 넌 못할거야"
"어디가서 잘할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내 전화를 안받아?"
- 김세희,『 드림팀 』中
나이도 5살 많은 사람이라, 왠만하면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사실 별일은 아니다. 그저 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 남친이 생긴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SNS프로필을 바꾸고 러브러브 모드로 전환했다. 남친은 (연애초기에 다 그렇듯) 선물을 자주 줬고 나는 그걸 하고 다녔다. 그녀의 상한 기분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 따라서 노처녀 될 일은 아니니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입술이 자주 튼다고 하니 남친이 디올 립밤을 하나 사줬는데 그걸 책상 위에 올려두고 틈틈이 발랐다. 자상한 남친을 생각하며 입술에 립밤을 듬뿍 올리고 있는데 메신저가 왔다.
"시드니, 남친 너무 티내는거 보기 안좋아. 헤어지면 어떡할라그래? 그나저나 토요일에 뭐해? 나랑 롯데월드 안갈래?"
음... 한국인으로 26년 살아왔는데 이 문장의 의도와 내용을 이해하는 건 상당히 힘들었다. 앞은 꼰대 선배처럼, 뒤는 세상 친한 친구처럼.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하지? 싶었다. 따뜻한 조언을 해주는 것 같지만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 나를 콘트롤 하려하지만 내가 잘 안되길 바라는 듯한 느낌. 이성은 애써 부정했지만 몸은 알고 있었다. 함께 있으면 몸이 뜨거워지며 속이 답답했다.
나는 그녀가 싫었다.
묵묵했던 내 마음이 꿈틀댔다. 즐거운 주말 저녁, 남친과 놀고 있는데 E에게 문자가 왔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오고, A보고서 내 책상위에 올려놔". 아니, 네가 부장이야? 그날 처음 남친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 회사 경력이 많은 남친은 부장에게 면담을 해보라고 했다. 조언대로 부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업무변경을 요청했다. 한 사무실에서 봐야하니 그녀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회계업무보다는 원래 전공을 살려 영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 부장님은 윗분들 사이에서 나를 이제 영업으로 보내야하지 않겠냐고 말이 나왔다면서 다음달 조직개편 때 영업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야호!를 외쳤다.)
곧 내가 영업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E는 갑자기 커피를 사준다며 부르더니니 "너가 엑셀도 잘하고 보고서도 잘쓰니 여기서 계속 크는게 나을 것 같다"며 날 잡았다. 귀가 얇아서 그런지 마음이 좀 흔들리긴 했다. 보통 한부서에서 3년은 있어야 업무가 마스터되는데, 2년 정도 있다가 가는건 뭔가 기본기만 닦고 끝나는 느낌이 들었으니. 사실 부장에게 영업으로 가겠다곤 했지만 망설임 반, 확신 반이었다.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보며 심난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파우더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드니, 걔 가르쳐 놨더니 도망가네? 걔 얼마나 일 지저분하게 하는데. 영업에서도 완전 후회할 껄?" 변기뚜껑을 닫고 바로 박차고 나갔다. 거짓말이다. 그녀와 일행들이 화장실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나왔다. 어차피 부서를 옮기게 되어있으니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고 대들 용기는 더더욱 없다.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말의 끝은 날카롭고 가슴에 흉터를 남겼다. 왜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자존감이 떨어지는지. 내가 그렇게 못났나?
그날 밤, 오랜만에 이 책을 폈다.
내가 너무 못났다 싶을 땐, 이 책을 펴야한다.
(참고로 15년 동안 소유하고 있는, 인생 책이다!)
누군가 나를 깎아내릴 때 『Go!』를 편다. 이 소설은 재일교포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첫 장편소설이다. 우리는 보통 상황, 직급, 환경에 의해 비하발언을 듣지만, 작가는 (조선인이라는) 태생적인 이유로 평생 차별 받아왔고, 이를 소설에 녹였다. 지금까지 설명만 보면 굉장히 무거운 내용 같지만 소설은 시종일관 쨉을 날리며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간단한 작가소개는 아래와 같다.
1968년 일본에서 태어나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조총련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영화나 책을 탐독했고, 이후 아버지의 전향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까지 얻으며 일본인 학교에 진학했지만 여기서도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됐다. (출처 : 나무위키)
"하와이에 가야겠어."
『Go!』의 첫 장면은 하와이에 가려는 아버지와 주인공 스기하라의 대화로 시작한다. 일본 땅에 발붙이고 사는 재일교포 가정. 아버지는 동생이 재일교포 북송에 참가해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로 강한 북한 쪽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국적 때문에 '하와이에 갈 수 없다'는 이유로 '옷을 갈아입듯' 국적을 한국으로 바꿔버린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조선학교(북한계)에서 초등/중학교를 다녔고 재학시절 학교 선생님 심지어 경찰까지 그를 꼴통 취급했다. 조선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족주의에 신물 난 그는 고등학교를 일본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첫날 조센징이라고 시비를 걸던 카토를 때려잡고 그와 친구가 된다. (싸우면서 친해지는 건 세계공통)
어느 날, 스기하라는 카토가 연 파티에서 사쿠라이라는 소녀과 만나 데이트를 한다.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걸 숨긴 채로 한 데이트라 시종일관 어색하지만 사쿠라이라면 이런 자신을 받아줄 수 있을거라 믿는다. 스기하라와 카토가 점점 마음을 열어가는 그런 때, 민족학교 시절 유일하게 맘을 열고 지냈던 정일이 일본 고등학생에게 칼에 찔려 목숨을 잃는다.
친구를 잃는 충격과 상실감을 가진 채 사쿠라이에게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사쿠라이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더럽다는 말을 뱉는다. 여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나온다.
충격은 받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무지와 무교양과 편견과 차별 때문에 튀어나온 말이었을 테니까.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부정하는 무척 쉬운 일이었다.
- 가네시로 가즈키,『GO!』201p
스기하라는 한국인이 '더럽다'고 하는 사쿠라이를 비난하거나 한국인임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그 발언이 '무지와 무교양과 편견과 차별'에서 튀어나 온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그말을 부정하는 건 너무나 쉬운 거라며. 남들이 하는 말에 갈대처럼 휘둘리는 대신 더 높은 곳에서 그 말을 무시해주면 되는 거다.
일본에는 순 일본인이 적고 대부분 중국,한국,러시아에서 유입된 혼종들이 사는 곳이라며 인종과 국적은 의미없다고 자신있게 떠벌리는 스기하라에게 한 재일교포 친구가 묻는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아봐여 차별하는 쪽이 알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잖아."
"아니, 우리들이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 가네시로 가즈키,『GO!』102p
스기하라는 차별하는 인간은 무지하고 나약하고 가엾은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강해져서 그 인간을 용서해주면 되는 거라고 한다. 방어를 위해 공부를 해야하는 현실이 슬프지만, 나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스스로 자신감이 있다면 어떤 공격와 충격에도 굳게 서 있을 수 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 세익스피어,『로미오와 줄리엣』
소설 맨 첫장에 인용된 세익스피어의 대사처럼, 장미가 장미로 불리지 않더라고 향기는 변함이 없다. 사회 초년생이라서 어려서 가난해서 아파서 등등 사회는 열심히 나를 차별하고 비하하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그들의 판단에 휘둘리기보다는 나의 향기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GO!』의 메시지다.
※ 추천 책 ※
김세희 『가만한 나날』
가네시로 가즈키 『GO!』(*영화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