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한 배를 타고 227일을 살아낸 소년의 이야기
빈 상자가 두 개 있습니다. A상자는 책으로 가득 차있고 B상자는 속이 텅 비어있습니다. 먼저 A상자를 딛고 서봅니다. 나도 상자도 멀쩡합니다. B상자를 딛고 서볼까요. 무게를 싣자마자 상자가 폭삭 주저 않습니다. 빈 상자가 당신의 마음이라면, 무엇을 채우겠습니까? 마음 상자가 위태로울 때 공허한 마음을 메워줄수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2020 Sydney Book Curation
1. 긴장되는 상황
2010년 10월의 어느 오전.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2000명 중에 2명을 뽑는 방송국PD시험 최종발표 날. 최종4인에 들었다는 자체로 이미 합격을 확신하는 부모님 앞에서 채용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수험번호는 외우고 있었기에 단숨에 빈칸에 번호를 치고 엔터를 누를 수 있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빨리 쳐봐’하며 채근하는 엄마 때문에 할수 없이 번호를 누르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온 몸이 뜨겁고 심장이 요동쳤다. 오랫동안 달려온 시간들이 빛을 발하든지 바래지든지 결정 나는 시간이다. 그동안 배수의 진을 치고 달려왔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번호를 다 쳐갈 때쯤 안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사실 합격자라면 전화나 문자가 왔을 터. 전화 문자가 없다는 건 합격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만의 하나를 생각하며 숫자를 쳐내려갔다. 숫자가 끝을 향해 갈수록 안 좋은 기운은 확신으로 변했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불과 몇 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땐 희망이 있었으니까.
결국 시험에서 탈락했고, 몇 달 후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2. 긴장되는 사람
그래도 상황은 낫다. 상황은 언젠가는 종료가 된다. 문제는 사람이다. 함께 있으면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사람이 있다. 첫 직장의 첫 상사가 그랬다. 그의 별명은 ‘호랑이’였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그 앞에서 남녀는 평등했다. 남자든 여자든 호랑이에게 걸리면 제삿날이었다.
호랑이를 통해 공기의 밀도가 상대적임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 주변의 공기는 한없이 가볍고, 누군가 근처의 공기는 한없이 무겁다. 60여명이 같은 공간에 있지만 ‘호랑이’ 근처 공기의 밀도는 유독 높았다. 그와 불과 2미터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는 터라 내 자리에 앉을 때마다 두통이 찾아왔다.
보고서를 들고 그에게 보고를 하러 그의 자리에 가면, 캄보디아 여행이 떠올랐다. 그는 200만명을 학살한 폴 포트 같았고 그의 뒤에 켜켜이 쌓인 책과 책장은 해골이 쌓여있는 킬링필드 위령탑 같았다. 입사동기들을 다 봐도 나처럼 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신입사원이라 실수를 해도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나는 실수하면? 바로 킬링필드행이었다.
‘호랑이’와 몇 개월을 보내고 난 후, 우연히 호랑이가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처음엔 나이도 많고 (언론고시시험을 2년동안 보다 입사했더니 일반신입보단 나이가 있었다) 표정이 어두워서 걱정했는데, 일을 굉장히 잘한다는 것이다.별 칭찬은 아니지만 ‘호랑이’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후광효과가 있긴 했다. 각종 프로젝트팀에 이름을 올렸고 해외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며 다양한 일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무렵, 정신을 차려보니 동기들이 회사를 많이 떠나있었다. 특히 지원부서에 있던 동기들이 많이 퇴사했다. 퇴사를 결정한 한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사 이유를 묻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 결론적으로 그는 무기력증이었다. 퇴사하면 뭘 할 거냐고 묻자, 다른 회사에 입사 할 거라고 했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연락이었다.
입사 10년차인 지금 그때를 돌아본다. 만약 ‘호랑이’가 주는 긴장과 몰아침이 없었다면 나는 이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었을까? 100% 확신 할 수 있다. 아마 퇴사를 하고 계속 시험을 봤을 거다.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들어가서 언론인이 됐을 수도 있지만 계속 탈락해서 무기력증에 빠졌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론 ‘과거에 대한 미련’을 갖을 새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그나마 인간구실 하는 존재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변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주변에 ‘호랑이’같은 사람으로 힘들어하면 이 책을 추천한다. 2002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이 책은 나의 인생 책이다. 누군가 정치적 신념으로 부딪치거나 조직생활이 답답할 때, 심지어 남편이랑 싸웠을 때도 이 책을 펴든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호랑이와 함께 한 배를 타고 표류한 소년의 이야기지만 어떤 책보다 인간의 삶과 본질, 역할에 대해 잘 담겨있다.
인도 폰티체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파이. 그의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동물을 모두 팔고 캐나다로 이민을 갈 계획을 세운다. 파나마 선적의 일본화물선 ‘침춤 호’를 타고 인도를 떠난지 얼마 안되어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해버리고 만다.
잠이 오질 않아 배 위에 나와있던 파이는 운 좋게 살아난다. 아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구명보트 위에 올라보니 다리를 다친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무시무시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함께 타있다. 야비한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순서대로 죽였다. 파이는 본인 차례가 옴을 깨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하이에나가 파이를 공격하려는 순간 구명보트 방수포 밑에 있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뛰쳐나온다.
리처드 파커는 하이에나를 끽 소리 없이 단숨에 죽였다. 다음 차례는 파이였다. 파이는 리처드파커를 없애고 보트를 독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구명보트 밖으로 밀어내거나(호랑이는 수영을 잘해서 물위로 다시 올라와 복수함) 여섯 대 모르핀 주사로 죽이거나(하지만 모르핀 주사 여섯 대를 연속해서 놓게 가만히 있지 않음) 여러 고민을 하다 소모전(그대로 지쳐 죽게한다)을 펼치는 걸로 결론을 내리지만, 호랑이가 갈등과 허기로 미치면 바로 자신이 제물이 될 걸 깨닫고 포기한다.
공포 때문에 온몸의 털이 곧추섰다.
결국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배에서 함께 사는 것을 택한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또는 비유적으로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호랑이를 길들여서 함께 살아간다. 소변을 받아서 자신의 영역에 뿌리며 호랑이의 영역과 자신의 역이 분리됨을 이해시키고, 물고기나 거북이를 잡아 먹이로 줬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에게 음식과 물의 공급원이었다. 리처드 파커는 어릴적부터 동물원에서 자라서 먹이가 와도 앞발을 들지 않는데 익숙했다. 동물도 자신이 조난 당했다는 것을 밀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체로 알 수 있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에게 신선한 물과 먹이를 주는 조련사인거다. 결국 리처드 파커의 기분에 상관없이 그가 있는 곳에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죄다 말하겠다. 여러분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더 무서운 거 아닌가. 내가 이작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있게 해주었다.
- 『파이 이야기』 p.237
“사랑한다!”
터져나온 그말은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내 가슴에서 감정이 넘쳐났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차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거야. 포기하지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 『파이 이야기』 p.334
육지에 다다르자, 리처드 파커는 밀림으로 사라지고 파이는 침춤호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그는 역사상 가장 긴 시간동안 바다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를 긴장하게 하는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파이는 조난 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을 그리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을 거다.
나를 긴장시키고 두려움을 주는 것들. 삶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가장 위협되는 존재로 인해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 한 겹 벗겨진 자신과 마주하는 것, 이것이 주인공 파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교훈이다.
오늘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상어를 봤다. 그 괴물같은 녀석은 6미터나 됐다. 줄무늬 타이거 상어 - 무지 위험하다.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공격 당할까봐 무서웠다. 호랑이 한 마리를 이기고 살았는데, 다른 놈 손에 죽게 생기다니. 공격 받지 않겠다. - 『파이 이야기』 p.338
사람은 발전이 있거나 변화가 있어야 살아가는 존재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버린다.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누리고도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그들이 생을 마감하는 이유는 하나다. 무기력으로 인해 우울하기 때문이다. 삶에 부족한 것이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스타벅스 프리퀀시를 하나씩 모으는 사람보다 덜 행복할 수도 있는거다.
인생을 살아내면서 나를 긴장시키는 '리처드 파커'가 나타날 지라도 두려워할 필요없다.
길들이면 되니까.
※ 추천 책 ※
얀 마텔 『파이 이야기』
- 출판사 작가정신의 리커버 에디션 (아주 칭찬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