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경험이 많아지고 다른 생각을 인정하게 된다
마음 속에 노인 한명씩 앉혀놓기
책 읽기의 장점은 간접경험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회사-집만 왔다 갔다 하는 내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은 가족, 학창시절 친구들, 직장동료 이게 끝이다. 이 카테고리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특히 채식주의자나 성소수자 등 비교적 소수취향을 가진 분들은 가까이서 경험해본 적 없기에 사회적 통념에 갇혀있다. 통념에 갇히면 그들을 오해하게 된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해외영업을 하고 있지만 일본 바이어를 만날때마다 심정이 복잡했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화제를 돌리고, 겨우 화제가 유지되면 2차대전 때 본인들도 피해자였다는 이야기나 늘어놓는다. 한국이 피해자고 일본은 정당한 사과를 해야한다고 소신있게 목소리를 내던 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은영 작가의 『신짜오,신짜오』라는 소설을 보게됐다.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투이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식탁의 분위기를 얼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하는 말투였지만 나는 그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최은영, 『신짜오,신짜오』
머리에서 껍질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나만의 세상에 갇혀있었다. 평생 한국이 피해자라고 생각했고 절대선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이런 일들이 있었다. 왜 내가 이걸 제대로 몰랐을까? 우리 교과서에도 이런 사실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참상에 대해 알게 된 후, 더 이상 일본 바이어들에게 이런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이니까.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었다. 한쪽 의견이 강하면, 다른 의견도 있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둬야했다.
책에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소설은 유독 감정기복이 심했던 나에게 좋은 학습도구였다. 소설 속에서는 별의 별일이 다 생긴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면 마치 내가 모든 걸 겪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미’ 그 일을 겪었기에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생겨도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한번은 회사에서 상사에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왕창 깨진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내가 억울한 상황었는데, 그때 문득 전날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떠올랐다.
갑자기 난 눈을 떴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뭔가 머리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사람 손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난 정말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런ㄴ데 내 머리를 만지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앤톨리니 선생의 손이었다. 선생은 어둠 속에서 긴 의자 옆에서 바닥에 앉은 채로 내 머리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난 정말 천피트는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뭐하고 계세요?」
「별일 아니야. 그냥 여기 앉아서, 감탄하고 있었지....」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학교에서 네 번째 퇴학통보를 받고 기숙사를 나와 방황하다 은사님의 댁에 하루 머문다. 갈곳 없는 홀든에게 편히 쉬라면서 침실을 내어준 선생님. 사회적 관계와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홀든의 말을 들어주던 선생님은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난다. 2박3일 동안의 부랑자 생활에 지친 홀든은 골아 떨어지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뜬다. 그의 눈 앞에는 홀든에게 변태짓을 하려는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이 이야기를 본 순간, ‘와씨’를 외치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홀든만큼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지만 저런 인간은 소설에서 꺼내서 능지처참을 시켜야 한다며 극도로 분노했다. 그 감정이 작은 트집을 잡아 나를 혼내는 상사 앞에서 떠올랐다.
미간을 확 찌푸린 상사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래도 이 사람은 나랑 사회적 거리는 유지하고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사람은 원래 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믿었던 어른에게 배신당한 홀든에 비할 수 있을까? 상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뉴욕시내가 펼쳐진 바탕화면을 바라보니 화가 풀려있다. 괜히 보스에게 대들었다가 더 안 좋은 소리만 들었을 터. 홀든에게 감사했다.
내 경험은 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직장인일수록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책은 보험과 같다. 접촉사고가 났을 때 보험이 들어있으면 안심이 되듯 책 읽기도 평소엔 잘 느껴지지 않지만 마음에 상처를 받을 일이 생기면 그동안 쌓인 마음근육이 등장한다. 이런 걸로 좌절하지마, 파이가 호랑이랑 배에 단둘이 남았을 때 어땠어? 결국 맹수와 공존하며 삶의 의지를 찾았잖아. 결국 육지에 도착 할 테니 좀만 힘을 내자.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책을 읽으면 타인의 경험이 내 안에 쌓아진다. 경험이 쌓일수록 내 멘탈과 몸은 업그레이드가 된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의 저서 『회복탄력성』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 있다. 회복탄력성은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기억하는 자아’를 통해 마음의 근육의 생긴 것을 말한다. 자신의 고난과 역경에 대해 긍정적으로 스토리텔링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회복탄력성이 높아지는데, 여기서 '고난과 역경'은 책을 통한 간접경험도 포함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유는 젊은 사람들의 인생은 지속시간이 짧으니 인과관계보다는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60세가 사는 세상은 벌써 70년이 가까이 지속된 세게다. 시간이 그정도 지속되면 결과를 통해 원인을 따져볼 수 있다. 대부분이 예측이 되기 때문에 거기서 노인들의 행복이 비롯된다.(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인용) 행복을 위해 바로 노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남들보다 빠르게 시간을 쌓아 올릴 수 있다. 마음 속에 노인 한명씩 앉혀 놓는 데는 책만 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