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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Jul 03. 2022

너 몇살이야?

어른의 '너 몇살이야'와 완전히 다른 아이들의 '너 몇살이야?"


아이 : 어울리기 위해 나이를 확인

어른 : 위계를 위해 나이를 확인     

     



위험회피 성향을 가진 예민한 아이를 키우고 있다. 다행히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는 편인데, 새로운 환경을 갑자기 마주하게 되면 예민함이 폭발한다. 갑자기 집에 모르는 사람이 온다든가,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일체험을 하게 되면 만사 거부 상태가 된다. 다소 사회성이 걱정되어 인파로 바글거리는 키즈카페나 수영장에 데려가 보고 축구클럽에도 등록해봤지만, 아이의 불안감만 가중 시킬 뿐 타인을 경계하는 성향이 나아지질 않았다.      


이런 아이를 위해 엄마로써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같은 반 친구들과 더 돈독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뿐. 아이가 자주 이야기하는 친구의 엄마들에게 연락해서 하원후 놀이터 타임을 가지곤 했다. 광활한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며 뛰어노는 아이를 보며 그래도 사회성이 나쁘진 않구나 하며 안심하고 있는데, 파안대소 하던 아이 표정이 확 굳어진 걸 발견했다.      


“너 몇 살이야?” 

우리 아이보다 한뼘 정도 키가 크고 몸이 투터운 한 아이가 골리앗처럼 서서 큰 소리로 묻고 있다. 몇미터 떨어져있긴 했지만 엄마들과 대화하면서 아이의 노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설마 내가 못본 사이에 분쟁이 있었나 싶어 급하게 아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온갖 생각이 든다. 갑자기 등치 큰 아이가 주먹을 들어 아이를 때려서 우리 아이가 넘어지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고, 아이 친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 결국 하원 후 놀이터 모임에서 배제되는, 최악의 상황.      


서로 노려보며 대치하는 아이들에게 재 빨리 달려가는데, 우리 아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일곱살인데?”. 오 노. 평소답지 않게 우리 아이도 다소 공격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에겐 한없이 친절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친절한 아이. 아이의 태도에 쩔쩔매며 반대쪽에 서있는 아이가 주먹을 들까봐 그쪽으로 내 손을 뻗는데 골리앗처럼 험악한 인상을 쓰던 아이가 갑자기 미간을 풀며 말한다.

“일곱살?! 내 동생도 일곱 살인데, 우리 같이 놀자!”      


등치 큰 아이가 다가와서 나이를 물은 이유는 이거 였다. 동생과 둘이 놀이터에 놀러 나왔는데, 친구가 없는 자기 동생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려고 우리 아이와 친구들에게 다가왔던 것. 나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듯, 아이들은 노을이 질 때까지 신나게 뛰어 놀았다.     


생각보니 나도 최근에 “너 몇 살이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내 상사에게였다. 논리없이 고집을 부리는 상사에게 ‘이 건은 이런 이유로 어렵기 때문에 상사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내가 니 친구냐?너 몇 살이야?’하며 화를 냈다.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왜 ‘친구’이야기를 하는 걸까. 업무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는 자리에서 왜 친구가 튀어나오는 건지. 아이들은 같이 소통하려고 ‘너 몇 살이냐?’라고 묻는데 왜 어른들은 위계로 찍어 누를려고 나이를 묻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이 외에는 상대방을 납득 시킬 방법을 못 찾는 모습을 보면 어른을 대표해서 쪽팔리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라는 말이있다. 일견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틀릴 때도 있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아이가 어른보다 더 본질에 가까울 때가 많다. 어른들은 하늘을 파란색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보는 온갖 색을 말한다. (실제 하늘은 색의 파장 때문에 파란색으로 보이는 것일 뿐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처음 나이를 만들어낸 사람도 나이라는 것이 등급을 구분하고 권위로 찍어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어울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을 거다. 유교사상이 깊던 조선시대에도 오히려 ‘상팔하팔’이라고 해서 위아래 8살까지는 다 친구 먹었다. 몇 살 많다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억누르는건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도 근본이 없는 행태다. 어차피 나이 몇 살 많다고 어린 사람보다 더 뛰어날 수 없다. 아랫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면 되는 걸 몇몇 꼰대들은 힘들어한다. 꼰대님들 가장 가까이 있는,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배우면 되는 것을.  


종종 나도 누군가에게 나이를 물을 때가 있다. 

“혹시 몇 살인지 물어도 될까요?”

“저 29살이요. 94년생.”

수줍은 표정으로 한번 더 묻는다. 

“어머. 부럽다. 요즘 20대들은 어디서 놀아요?”

“압구정로데오? 아니면... 망리단길 아닐까요?”     


그러면서 요즘 사는 이야기, 요즘 젊은 세대의 고민거리 정도 나눈다. 상팔하팔에 겨우 맞아 떨어지는 나잇대라 친구를 먹긴 어렵지만 그래도 어린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상대방의 생각을 알고 이해하려는 목적 외에는 절대, 절대! 남의 나이를 묻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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