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안 무서운데 왜 그러세요
빈틈없는 사람이
당신의 부장이라면
그니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냥 조직의 부품 하나로 존재하며 내가 길들여낸 소소한 일상에 충실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면 잠깐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어쩌다 필받은 날은 열나게 야근하다가 똑같이 더럽게 재수 없는 인간들끼리 모여서 술이나 퍼먹으며 거지발싸개 같은 회사원 라이프에 대해 토로하다가 진짜 길에 토하기도 하고 정신 잃은 동료들 택시 태워 보내고 (그중 20대 여사원들은 꼭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고 - 참고로 나 여자임) 집에 가서 씻고 남편한테 한 번만 더 이 상태로 집에 들어오면 아들이랑 둘이 가출하겠다는 반가운(?) 협박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벌러렁 쓰러져 자는 정도.
만취상태에서 꾸는 꿈 속에서는 드라마 작가가 돼서 회사에서 겪었던 온갖 그지같은 일들을 사실대로만 썼을 뿐인데 이 시대를 대변하는 하이퍼리얼리즘 대작이 나왔다는 대중들의 찬사를 받으며, ‘지금을 타임캡슐에 넣어둔다면 이 작품‘이라는 문단의 호평을 받는 스타작가가 돼서 돈을 쓸어담다가 아들 발바닥에 가슴이 눌려 헛구역을 하며 기상하는. 꿈이어서 아쉬웠지만 참 좋았었다는 감정을 가슴 꼭 끌어안다가 엉덩이 불난 듯 다시 출근준비를 하는 상태. 그니까 딱 이정도만 유지하면서 살고 싶었을 뿐 이다. 이정도만 해도 최대 행복은 아니어도 뭐 죽을 정도는 아니지 하며 살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예상과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정사가 있어 한달 정도 돌봄휴직을 내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간만에 회사를 벗어날 일상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남서향인 우리집 거실에 누워 천천히 볕이 드는 시간을 기다렸다. 동쪽에서 뜨겁게 발광했다 서서히 열을 식히며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모든 사물들의 열정도 지금 휴직을 하는 나처럼 완급조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업무에서 뒤처지는 상황에 대해 정신승리 하고 있을 찰나, 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시드니, 복직한 다음주에 예비관리자 교육 가야돼.”
부장님은 예비관리자 Pool에 들어갔으니 곧 인성검사 및 다면평가를 받을 거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내가 뭘... 뭘 들은거지? 나 지금 너무 행복한데. 내 업무분장대로 내 할일만 딱 하고 칼퇴하고 집에가서 쉬고 싶은데 나더러 지금 부...부장을 하라고? 주중에 칼퇴라곤 없고 왜요?제가요?지금요???가 입에 엿가락처럼 달라붙어있는 MZ세대들 데리고 부...부장을 한다고? 오마이갓!!
절규는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복직하고 예비관리자 교육에 와있었다. 연수원에 도착하니 제일 막내였다. 한참 후배가 같은 예비관리자 교육을 듣는다는 거에 대해 불평을 가진 선배는 커녕 다들 따스하게 맞아주셨다. 또 모르는 사람이나 모르는 업무를 하는사람들 만나면 질문이 폭발하는 타입이라 담소를 나누다가 금방 친해졌다. 하지만 빡센 예비관리자 교육은 선후배끼리 사담을 나누게 두질 않았다. 일주일 동안 아주 빡세게 다양한 교육을 했다.
장장 5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마지막날 서로 리더십에 대해 평가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조는 6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는 5명에게 일주일간 내가 보여준 리더십 역량에 대해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다들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지만 딱 한분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시드니님 같은 분은 제가 부장일 때 직원이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발 제 위로 오진 말아주세요. 너무 빈틈이 없어서 무서울 것 같아요. 유일하게 드리고 싶은 조언은 빈틈을 좀 만들자-입니다.”
저 말을 듣고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평소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며 대충 눙치며 웃어 넘겼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저 말이 가슴에 남았다. 빈틈이 없다라. 내가 보는 나는 빈틈 투성인데 왜 저렇게 생각하셨을까 싶다.
나를 한번 돌아보면, 시장조사 업무를 했던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방대한 자료를 자세히 꼼꼼하게 보고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편이다. 데스크 리서치 자료 200장을 A4 1장으로 줄이고 거기서 인사이트 도출해서 사업구조화를 하는 게 최근 3년간의 업무였다. 정보를 많이 가진 편이라 후배들이 질문을 하면 답을 잘 주는 편이다. 반면에 누군가 반박을 하면, 특히 그게 감정적인 반박일 경우 논리로 대응한다. 내가 그려낸 논리구조에 누군가가 '이거 너무 억지 아니에요?'라고 했다고 치자. 그럼 다시 되 묻는다. 억지라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뭘까요. 근데 그게 더 근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말씀은 알겠는데 앞뒤가 안 맞네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딱 한번 설명만 되면 모든 걸 위임하고 맡기는 편이지만 진입장벽이 높은 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대화가 안된다 싶으면 아예 대화를 포기해버려서 말이 없어지면 더 무서워하기도 한다. 사실 타인을 무섭게 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가 나를 무서워할 때 전혀 효능감이 없다. 오히려 내가 어떤 부분이 무서웠는지, 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뿐인데 왜 나랑 회의하는 사람들이 몇몇 빼곤 긴장해서 오는지 이해가 안된다. 물론, 감정적 공감을 잘 해주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학습한대로 조금 따라 해봤지만 (대...대리님...힘...힘드시..죠?) 영민한 동료들은 내 연기를 금방 눈치챘고, 어설픈 연기는 때려치고 타고 난대로 생긴대로를 선택했다.
이런 평가를 받으면 이상하게 친한 동료들에게 공유하고 싶어진다. 이유는 “아니야~ 시드니 얼마나 착한데~~ 겉으로만 쎄지 완전 순두부야~~” 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혹시나해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에서 친한 후배에게 선배들의 멘트를 전달줬다. 그랬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한다.
위로는 커녕 숨... 숨통? 내가 언제 그랬냐!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살아왔으니 저렇게 말했겠지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대체적으로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내가 보는 나보다 정확하니까. 그래서 빈틈을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빈틈을 만들어야 하는 지 누가 상세하게 알려주면 좋겠다. 주현영 성대모사라도 해야 하는지 아니면 고향 사투리라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좀 너그러워져야 하는지?
누가 좀 알려주세요.
저도 저같은 사람이 부장 되는게 무섭습니다.
근데 나 착한데... 저 착해요... 믿어주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