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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May 13. 2023

청담동 원주민

조선시대 통역사 홍순언과 강남녀


청담동의 자랑을 뽑는다면

이 사람 아닐까  







예전에 소개글에서 썼던 것처럼 나는 청담동에 ‘거주’하고 있진 않다. 다만 ‘거주’하지 않을 뿐 생활반경은 모두 청담동이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는 정류장부터 장을보는 곳, 아이학교, 학원, 운동하는 곳, 글 쓰러 나가는 카페, 지인들과 부대끼는 곳은 모두 청담동이다.      


이렇게 청담동에서 생활 하다보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난다. 브런치북에서 언급한대로 상위1% 부자부터 별 생각없이 이 동네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 회사 때문에 또는 꿈 때문에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여러 색깔의 청담동을 본다.      


요즘 글감이 조금 떨어지기도 했고 뭔가를 생각해서 완성된 에세이 한편 쓰기엔 생업에 치이는 중이라 ‘최근에 누굴 만났는데’ 느낌으로 재빨리 속닥일 수 있는 이 동네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첫 스타트를 누구로 끊어볼까 하다가 생각난 건 이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생각나는 이유는 온전히 나의 상황 때문이다. 몇 번 언급했지만 13년차 해외영업러다. 연차가 쌓이면서 최근에는 회사에서 통역과 의사결정을 동시에 할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여러 상황에 휘말리는 중인데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음에도 어려움을 교과서처럼 극복해낸 사람을 발견했다.      


바로 조선시대 역관 홍순언. 조선시대에는 ‘통역사’라는 말이 없어서 당시 역관(譯官) 홍순언으로 불렸다.

(자본주의를 대표할만 한 핫한 청담동 사람들 이야기가 나올 걸로 기대한 독자님에게는 송구한 마음을 전해드린다. 그런 분들 이야기는 차근차근 풀어보는 걸로.)      


** 다소 내용이 깁니다 **

(긴 글이 부담스러운 분은 홍순언과 강남녀 설화 재연 영상 참고해주세요.)




청담동에서 태어난 홍순언은 젊을 때 불행한 사람이었다. 아니, 청담동에서 태어난 부유층인데 왜 불행했지? 싶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 청담동은 지금 강남구 청담동의 모습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군에 소속된 허름한 낚시터 같은 곳이었다. 게랑 붕어가 특산품이었다고 하니 지금 모습과 꽤 달랐을 거다.      


홍순언은 서자출신으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일찍히 중국어(한어)를 익혀 중국어 통역사가 되었다. 역과에 급제한 후 (통역사 시험) 중국 연경에 체류하던 홍순언은 중국 공무원들에게 끌려 홍등가에 가게 된다. 홍순언은 그중 가장 값이 비싼 금 3천냥을 해어화채[(解語花債(몸값))로 제시한 기생의 방에 들게 되었다.     

그가 들어간 방의 기녀는 용모가 준수했으나 흰옷(소복)을 입고 있었다. 홍순언이 기녀에게 사연을 물은 즉 소녀의 성은 류씨로,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이다. 그러나 아버지 류모가 공금횡령 혐의로 누명을 쓰고 옥사하고 모친마저 죽게 되자 부모의 장례를 치를 사람과 비용이 없었고,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기방으로 팔려왔다는 것이다.      


홍순언은 대죄하여 무릎꿇고 '작은 나라의 미관 말직 벼슬아치가 어떻게 대국의 귀한집 따님을 욕보이겠습니까' 하며 부복하여 절을 올리고, 자신이 가져온 돈 2천 냥과 인삼을 그녀에게 주었다. 2천냥과 인삼을 팔아 마련한 돈 1천냥으로 그날로 류씨 소녀의 빚을 청산해주고 장례비용까지 대주었다. 류씨 소녀는 거듭 감사하다 하며 그에게 성과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냥 조선의 통역사다라고 했다. 류씨소녀는 하며 거듭 감사를 표시했고, 그는 친히 소녀를 배웅하였다. 조선의 역관들은 조정의 허락 없이도 사적으로 인삼과 비단 무역이 가능했는데, 동료 역관들은 이것을 공짜로 류씨 소녀에게 주고 온 그를 바보라고 놀려댔다. 도리어 그가 류씨 소녀에게 준 2천냥의 돈이 공금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하지만 얼마 뒤 석방되었다.     


이후 동료 역관들은 홍순언이 중국에서 소녀를 구한 사실을 물었으나 그는 덮어두라며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기방에서 석방된 류씨 소녀는 홍순언이 준 3천냥으로 빚을 청산하고 부모의 장례를 치른 뒤 아버지의 친구였던 예부시랑 (외교부 차관) 석성(石星)의 집에 하직인사차 들렸다. 오갈데 없던 그는 당시 석성의 본부인이 병환을 앓고 있었으므로, 석성 부인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류씨 소녀의 지극정성의 간호에도 석정의 부인은 차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모습에 감격한 석성은 류씨 소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였다.     


석성은 예부시랑(외교부)에 있다가 병부시랑(국방부)을 거쳐 예부상서(외교부 장관)로 승진했다. 류씨 소녀는 하루하루 황금 비단을 손수 짰는데, 병부시랑 석성의 후처가 된 뒤에도 류씨부인은 밤마다 직접 비단을 계속해서 짰다. 비단에는 보(報)와 은(恩)이 쓰여 있었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석성이 류씨 부인에게 사연을 묻자 류씨부인은 아버지 류모의 빚과 장례비 마련이 어려워 기방에 갔던 일과 홍순언을 만난 일을 고백하였다. 석성은 동이족(중국인이 동북부에 일대 거주한 주변인을 부르던 말) 중에도 의인이 있다며 그 기상을 칭찬하였다.     


이후 조선에서 종계변무사신 (중국 역사서에 잘못 기록된 조선왕의 족보를 고치는 일을 하는 조선 공무원들)이 파견될 때마다 담당인사였던 석성은 사신은 만나주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홍역관이 왔느냐는 질문을 계속 했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신들은 귀국 후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윽고 1588년(선조 21년)에 조선왕은 종계변무사 2인을 또 파견했다. (성리학 중심인 조선시대에는 족보를 고치는 게 이렇게 중요했다) 이때 홍순언은 역관으로 파견되었다. 변무사절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중국 외교부 장관격인 예부상서 석성이 요동의 국경까지 영접 나와 홍역관이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자신임을 밝히자 석성은 큰절을 받으라며 그를 친히 모셔갔다. 이상하게 여기던 중 장안의 관사에 도착하자 귀부인이 나와 그에게 큰절을 올렸는데 이는 그가 명종 때 구해준, 이제는 석성의 후처가 된 류씨 소녀였다.     


석성은 동방에도 그대와 같은 의인이 있었다며 후히 대접하였고, 황정욱과 홍순언은 《대명회통》과 중국 《태조실록》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로 기록된 내용이 잘못이고, 이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임을 황제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대소관리들은 당대에 수정하지 않고 이제 와서 계속 번거롭게 구느냐며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당시 예부상서였던 석성의 적극 건의로 개정되었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사절단은 귀국하였는데, 류씨 부인은 손수 짠, 보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황금 비단 1백 필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일은 장사치나 하는 것이라며 비단을 거절하고 귀국했다.    


사신이 탄 말이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류씨 부인과 하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되어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금수만도 못한 것이라며 비단을 받기를 거듭 부탁하며 하소연하니 비단을 받아서 되돌아왔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고, 면천 허통하여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 후에 우림위장(羽林衛將)이 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통역사로 시작했다가 국방부 차관까지 했다고 보면 된다.)      


(출처: 위키백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홍순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홍순언의 말은 조리가 있어서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오래 들으면 피로도 잊었다”. 천한 위치(서자)였음에도 마음씨를 바르게 써서 본인도 출세하고 나라도 구한 홍순언.


청담공원 홍순언과 강남녀 전설

     

청담공원 입구쪽에는 ‘홍순언(洪純彦)과 강남녀(江南女) 전설’를 새긴 비석이 있다. “이곳 청담동 출신인 홍순언~”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홍순언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을지 느껴진다. 서자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이겨내고 역관에 급제한데다 바른 마음씨를 행동으로 옮겨 결국 나라까지 구한 홍순언.


가히 자랑스런 청담동 출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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