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루루에서 뜻밖의
정체성 발견
"쌀밥에 김치인간"
울룰루–카타츄타 투어를 마치고 11시가 되어서야 호텔방에 들어왔다. 하루밖에 묵지 않았는데도 사막의 찬바람을 맞고 돌아오니 이 방이 고향처럼 느껴졌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이불 속으로 몸이 파묻히고 사막의 공기 대신 숙소의 온기가 퍼졌다. 잠이 스르르 쏟아지는데 배가 고프다. 허기가 느껴진다. 전형적인 호주 음식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추운 날엔 영롱한 쌀밥에 뜨끈한 국물을 말아 먹어야 하는데 호주 사막 한복판에서 그런 호사를 누리긴 어렵다. 그러다 문득 마트에서 스쳐 지나갔던 CJ 컵밥이 떠올랐다.
호텔 방을 나와 타운 스퀘어(Town Square)로 향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오전 내내 10도 이하의 공기에 떨었는데 오후에는 24도였다. 늦봄의 온도인데도 달력상으로는 한겨울이라니 사막은 확실히 사막이다. 태양은 뜨겁고 그늘은 차갑다. 걸음을 옮기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곳 기후의 극단은 사람의 마음과 닮았다. 뜨거웠다가 금세 식는다. 그런 사색을 하며 마트에 도착하니 진열대 한켠에서 낯익은 한글이 나를 반겼다. 농심 해외영업팀이 뚫어놓은 듯한 컵밥과 라면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김치참치컵밥과 미역국을 바구니에 담고 잽싸게 계산대를 통과했다.
문제는 전자레인지였다. 마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호텔 프런트에 물으니 세탁실 옆에 있다고 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컵밥의 비닐을 뜯고 햇반을 꺼내 김치소스를 부었다. 솔직히 약간 동물이 먹는 밥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자레인지 안에서 폴폴 피어오르는 밥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순간 모든 이성이 무너졌다. 이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냄새 한 줄기에 쌓인 피로와 고향의 기억이 동시에 덮쳐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5분도 채 걸리지 않아 컵밥의 내용물은 컵에서 내 뱃속으로 옮겨갔다. 와 진짜 이거다. 뜨거운 밥알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온몸이 확 살아났다. 빵이나 샐러드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해외영업을 하며 수십 나라의 음식을 먹었지만 이 꽉 차오름은 한식만이 준다. 오직 농심만이 이 허공 같은 사막 위에서 나를 채워준다. 컵밥 하나로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라니 웃기지만 진심이었다.
칼칼한 김치덮밥을 다 비우고 후식으로는 호주산 제철 수박을 먹었다. 국적이 다른 음식이지만 의외로 궁합이 좋았다. 한 그릇을 비우자 이상하게 뿌듯했다.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농심의 울룰루 진출에 담당자도 눈물이 났겠지만 지금은 내가 더 눈물이 날 것 같다. 농심 승승장구하세요. 지금보다 더 멀리 사막 끝까지 가시길.
식사를 마치고 창문을 열자 사막의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포만감과 따스한 공기가 함께 몸을 덮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쌀밥을 먹고 나니 머리가 멍해지고 식곤증이 밀려왔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자 시트가 부드럽게 몸을 받아주었다. 스르르 잠이 드는 동안 어떤 고통도 스트레스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흰 쌀밥과 김치만 있다면 참치캔이 하나쯤 곁들여진다면 세계 어디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걸 정체성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