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데리러 간다
가족과 저녁을 먹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각자 쉬는데...
요즘 퇴근길 필수 코스는 동네 수학 학원이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거의 매일 보내고 있는데, 사실 공부 목적도 크지만 이 학원이 저녁 7시까지 아이를 잡아두기 때문이다. 맞벌이 부부에게 7시까지 운영하는 학원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절실한 보육기관이다. 대치동 체인이라 레벨 테스트가 필수였는데, 내 승진 시험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의 기쁨이란! 드디어 하원 시터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학원 앞은 종종걸음으로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하다. 요즘 눈에 띄는 변화는 아빠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는 것. 가끔은 대기 줄에 나 혼자 엄마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묘하게 침울해진다. 남성의 육아 참여도가 높아지고 휴직 비율이 30%를 넘겼다지만 내게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침울함도 잠시,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빠!" 하고 달려가는 아이를 인자한 미소로 맞는 아버지들. 그들은 이내 아이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준다. 화면에 정신이 팔린 아이의 걸음이 위태로워 보이지만 저것이 '아빠 육아'의 특권이려니 하며 시선을 거둔다. 그때 반갑고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엄마!" 환하게 웃으며 달려온 우리 아이가 귓속말을 하겠다며 고개를 숙여보란다. “엄마, 여기서 엄마가 제일 예뻐!”
아이와 집에 도착하니 '귀하신 분'이 이미 와 계신다. 식탁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쌈이 놓여 있다.
"어머, 나 이거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당신이 지난주에 먹고 싶다며."
무던하다 못해 무심해 보이는 남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세심하다. 밖에서의 직함이나 상황은 세월 따라 변했지만 집 안의 풍경은 신혼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이 소박한 일상에 감사하다가도 문득 마음 한구석이 턱 하고 막혀온다. 잡생각이 덮치기 전에 얼른 보쌈 한 점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급하게 먹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자 남편이 툭 던진다.
"하이볼 마실래?"
어찌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입이 짧은 아이는 고기 몇 점에 배를 두드리며 거실로 사라진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아이에게 TV를 틀어주고 남편에게 슬쩍 운을 뗐다.
"여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만약에 말이야……."
"만약은 무슨. 그냥 물어봐."
"응. 혹시 회사에서 불륜 같은 거 본 적 있어?"
무쌈 위에 고기를 얹던 남편이 무심하게 답한다.
"있지. 신입 때 같은 부서 대리랑 옆 부서 새신랑이 바람났었어."
"세상에, 결말은 어땠어?" "어떻게 되긴. 여자는 금방 퇴사했고 남자는 얼굴 두껍게 아직도 다녀."
"그렇구나…… 그럼 여보는 그 사람들 어떻게 대했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기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을 주시했다. 내게는 중대 사안인데 남편은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대하긴 뭘 대헤. 쓰레긴데. 그냥 없는 사람 치고 살았지."
"그치? 근데 난 내 성격상 동생 같아서 어디 끌고 가 한마디 할 것 같거든. 너무 오지랖인가?"
남편이 처음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절대 그러지 마. 당신만 이상한 사람 돼. 내버려 둬. 어차피 알아서 망할 테니까."
"그 새신랑도 그랬어?"
"응. 결국 장모님이랑 아내가 회사로 들이닥쳐서 난리 났었지. 심지어 아내가 임신 중이었거든. 승진 누락되고 지점으로 쫓겨나고…… 결말은 뻔해."
상념에 잠긴 나를 보며 남편이 묻는다.
"누가 바람피워?"
"어, 가까운 데 좀 있는 것 같아서."
"신경 꺼. 투명 인간 취급해."
[각자 쉰다.]
뒷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넘겨본다. 남편과 아이가 캐치볼을 하러 나간 덕에 짧은 정적이 찾아온다. 조용해지니 다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경 끄자, 신경 끄자…… 주문을 외우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 바로 옆자리 김 대리와 뒷부서 남자가 불륜이라니. 익명 게시판에 올라올 정도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건데, 다들 어쩜 그렇게 '청룡영화상'급 연기력을 펼치며 태연한 걸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연기다. 아니, 나보다 더 걱정되는 건 뇌까지 투명한 우리 부장님이다. 부장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엔 어떤 난동이 펼쳐질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래, 모른 척이 답일지도 모른다. 괜히 '언니 마음'으로 조언했다간 긁어 부스럼만 될 게 뻔하다. 어차피 평생 같이 갈 부서도 아니니 사무적으로만 대하자고 다짐하며 넷플릭스를 켰다. '솔로지옥' 속 화려한 출연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한 남자를 보던 중 나도 모르게 외쳤다.
"어? 저 남자 주호 닮았는데?"
사실 그 동기는 별명이 '못생긴'일 정도로 훈남이다. 하지만 매일 메신저로 투닥거리는 동기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화면 속 출연자의 매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건 때론 지독한 고정관념으로 번져, 그 대상이 가진 본연의 매력마저 가려버리는 안개가 되기도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20대의 연애 서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다. 마침 아이가 잘 시간이기도 해서 미련 없이 TV를 껐다. 아이 키우는 집의 밤은 가위로 자른 듯 명확하게 정지한다.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 들려는데, 아까 저장해둔 '김희은 씨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