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았다.

by 시드니


"안녕하세요. 혹시 신지윤 과장님이실까요?"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고 해놓고 흠칫한다. 보통 상황이라면 어디세요? 라고 발신자의 신원을 물었겠지. 하지만 이미 저장해 둔 번호라 안녕하세요,라고 했고 상대방도 상황을 알고 있는 눈치다.


"저는 이종훈이라고 합니다. 김희은씨 남편 되는 사람이에요."

"아, 네. 안 그래도 번호를 저장해 놨어서... 희은씨 괜찮나요?"

"네, 덕분에요. 과장님께서 잘 도와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병원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그녀를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개인 서랍을 열어보아서 그녀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 말곤.


"혹시 댁 주소가 서울시 동작구 xx아파트 맞으신가요?"

"아, 네 맞아요."

"희은이가 신세졌다고 망고 한 상자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병원 같이 가주셨다고."


오늘 본 일을 잊어달라는 신기한 방식의 제안이었다. 망고는 잊을 망(忘)인 건가. 잠시 생각하다 일단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예전에 동료에게 와인을 한 병 받았다가 괜한 일에 휘말린 선배가 생각나기도 했고.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꼭 보내달라고 해서요.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제가 내일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다. 최근 계속 남초 부서에만 있었어서 이런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여시짓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김희은, 이 여자 큰일 날 사람이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으니 남편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자초지종을 말하니 남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구나. 안 받은 건 잘했어. 그런데 괜히 뭔가 아는 척 하지 마. 뭐든 모르는 척하고 평소처럼 대해."

"그게 가능할까? 난 머릿속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사실 더 걱정되는 건..."


부장이 아는 게 제일 무섭다. 자기 부서원이 불륜인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딘가로 튀어가서 상담을 받고 있겠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자기에게 오는 피해부터 철저히 계산할 사람. 만약 누군가에게 과오를 덮어씌울 필요가 생긴다면 거리낌 없이 지목할 사람이다.


의리라고는 없는 부장을 생각하다 보니 나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겠다 싶다. 옆 자리 직원이 불륜을 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다. 아니다. 사실 몰랐다고 할 수가 없다. 그 서랍의 편지를 열어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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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를 털어내듯 급하게 편지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데, 문득 남편이 떠올랐다. 입사 초기 업무 내용도 모른 채 야근을 강요받던 시절. 선배들이 하나둘 퇴근하면 꼭 우리 둘만 남아있곤 했다. 우리는 요령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성실한 모지리들이었으니. 그날은 배가 고파 편의점에 다녀오는데 야근 메이트가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귀찮은 듯 비키라는 나의 말에 그가 물었다.


"많이 남았어? 언제까지 해야 돼?"

"모르겠어. 오늘 안 끝날 것 같아. 오빠는?"

"나?"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너에게 달렸지."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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