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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an 19. 2023

로또 불러주는 할아버지

5번 아니 7번을 불러줘도 1등 못하는 엄마

친구랑 돌아가신 아빠가 나온 꿈 이야기하다 생각난 에피소드 중 하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고 짱친이었던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모두가 마음이 궁핍하고 폐인이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다녔는데 그중 엄마가 제일 심각했다. 집 뒤에 있는 산으로 드라이브하면 어느 특정 구간에서 음산한 기운을 느끼고 공포에 질려 공황상태였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5년을 할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그리움에 힘겨워했고 가족들과 단체로 싸우고 때로는 요양원에 모신 것에 대해 죄책감에 실렸다. 그렇게 1년, 3년, 4년쯤인가 5년이 되었을까?


엄마는 매일 밤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는 꿈을 꿨는데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그만 울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선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어떤 요구를 들어달라고 했는데 묘지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몇 차례 꿈을 꾼 엄마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묘지를 찾아갔더니 묘지에 문제가 있었고 관리하시는 친척분이랑 개싸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러곤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꿈이 나타나 설명도 없이 대뜸 번호 7개를 불러주고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꿈에 매번 나타나 “잘 들어~” 첫마디를 하시곤 번호를 마구잡이로 7개를 부르고 사라지는 할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한동안 어벙벙하셨고 자고 일어나면 그 숫자들을 까먹어 영문을 모르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곤 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당시엔 새아빠도 그렇고, 엄마도 로또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어릴 땐 로또 방송을 매주 챙겨봐야 하는 당연함이 존재했다.) 방송을 보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번호는 모두 로또 번호구나! 깨달았다고 하셨다. 그 뒤로 할아버지만 나오길 기다렸다가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당연한 듯 번호를 불러주셨는데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로또 번호라는 걸 깨달아 번호를 기억하려고 애쓰면 잠에서 깨 불러주는 모든 번호를 까먹어 머리를 쥐어 잡는 모습을 종종 봤었다.


엄마는 자신에게만 나타나 울기도 하고, 어떤 요구사항을 말하는 것도 할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서 그렇다고 했는데 어린 내가 봐도 할아버지는 참 엄마를 사랑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 엄마의 마음을 할아버지는 늘 알고 있었도 아마 그래서 가장 아낀 딸의 손녀였으니 손자손녀 중에 날 가장 사랑했겠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3번쯤 되었을 때 꿈에 나타나 번호를 불러주는 할아버지가 본인 성질에 못 이겨 엄마에게 ”너는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냐? 그냥 받아 적어!“ 화를 내셨다고 한다. 엄마가 허둥지둥 손바닥에 불러주는 번호를 적으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숫자를 너무 빠르게 불러서 적는 속도를 못 따라 울먹이며 할아버지에게 다시 불러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뭐라고 하시면서도 또다시 불러주셨고 엄마는 항상 그랬듯 잠에서 깨기만 하면 숫자를 대부분 까먹어 기억을 되살려 로또 번호를 넣으면 5등, 꽝 둘 중 하나였다.


5등 되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번호 불러주기 전에는 단! 한! 번도! 5등조차 해본 적이 없다.


5등만 되면 “잘 들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또 혼내겠네…” 한탄하는 엄마를 보면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신기했었다. 왜 꿈에 엄마한테만 나타나시는 걸까? 외가에서 아무도 할아버지 꿈을 꾼 사람이 없는데 엄마한테만 나타나시고 매번 로또 번호를 불러주는 것도 신기하고 매번 잠에서 깨기만 하면 그 번호를 까먹는 엄마도 신기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원래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라곤 찾을 수 없으며 말 안 듣는 걸 정말 싫어하시는데 호통 안 치고 계속 불러주는 할아버지도 많이 참으신다고 생각할 때쯤 엄마가 울먹이며 꿈에서 깬 날이 있었다.


“아.., 또 까먹었다. 아 진짜…”


할아버지가 또 빠르게 불러주셨어? 라고 엄마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웃겨서 지금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호통을 치면서 ‘너는 멍청하면 메모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받아 적어, 인마!!!‘ 소리치시고 내가 천천히, 제발 천천히 불러주라고 했는데 받아 적고 번호 확인하다가 깼어…, 근데 또 번호가 기억이 안 나.. 24.. 그다음 뭐였지? “


또다시 로또를 구매했을 때는 정확한 번호인지 가늠이 안 돼 대충 비슷한 다른 번호로 로또를 산 적이 있는데 엄마가 기억한 번호가 맞아서 방송 보고 울먹거리며 “아씨, 아버지한테 또 혼나겠네.. 에이씨..”


그때 엄마의 표정은 흡사 할아버지가 생전에 살아계실 때 호되게 혼나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로또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엄마는 5등이 되었고 다음 주에 또다시 나타난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 참고 참았던 참을성을 잃고 ‘너는 왜 이리 멍청해!! 까먹을 거면 제대로 적기라도 하던가!!!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또 그러면 다시는 말 안 해줘, 어?!? 알겠어!?!? 제대로 받아 적고 잊지 마!!!‘ 하며 마지막으로 불러줄 테니 이번에도 틀리면 다시는 안 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반복해서 재차 불러준 전부는 아니지만 몇 개의 번호를 까먹어 엄마는 몇 개의 번호만 기억해 낸 채로 일어나 바로 로또를 샀는데 4등으로 5만 원을 받았고 할아버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때 나는 엄마 꿈속에만 나타나는 할아버지가 신기했었다. 마지막 꿈까지 무엇하나 할아버지스럽지 않는 것이 없었고, 살아생전에 계셨을 때 성질내는 것부터 말투랑 똑같았다는 것도.. 또한, 몇 번이고 나타나서 번호를 정성스럽게 불러준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엄마가 어렴풋 기억해서 로또를 사면 모두 맞춘 것도 신기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바라는 꿈 아니겠는가. 돌아가신 이가 나타나 내 꿈에서 로또 번호를 불러주는 아주 특별한 꿈 말이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틀리고 기억도 못하는 딸한테 나타나 좀 맞추라고, 이번엔 제발 제대로 듣고 기억하라고 호통치는 할아버지, 엄마가 불러준 로또 번호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하신 말, 한 번 하신 말은 끝까지 지키는 할아버지.


로또 번호 이후로는 다시는 엄마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엄마는 자신의 아버지가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꽤나 섭섭해하셨다. ’한 번만 더 나와 밤호를 부르면 그땐 절대 잊지 않을 자신 있는데…‘ 중얼거림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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