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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Feb 15. 2023

타인의 시선 그리고 욕망의 간접화

-박지영 소설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스토리(story)와 플롯(plot)       

  슈클로프스키는 문학의 본질을 낯설게 하기로 보고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 혹은 기법을 앞세웠음은 앞에서 반복해서 살펴본 바 있다. 그렇게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일상언어와 예술언어를 분리했는데, 전자는 낯익고 흔한 것으로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며, 후자는 낯설게 이야기를 흩어놓아 독자가 하나하나를 감지하고 경험하게끔 하는 기법이다. 공기나 습관적인 동작이나 낯익은 이념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한다. 예술은 이런 것을 늦추고 경험하고 감지하게 만드는 미학적 장치다.

  예술은 내용을 낯설게 재배치하고 감지하게 만드는 미학적 장치다. 스토리와 플롯, 파블라와 수제. 다시 말해 플롯은 스토리를 낯설게 흩어놓은 형식으로 독자는 이 형식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용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사건을 실제 일어나는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라면 플롯은 작품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다.

  박지영 소설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에서 스토리는, 곧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을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인 ‘강선동’의 한자 이름은, 착할 선善에 아이 童, 착한 아이로 살라고 그의 할아버지 강욱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러니까, ①강선동이 태어났다. ②강선동의 아버지 강만석은 아들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까닭은 착한 아이의 세계가 얼마나 좁고 답답한지, 수많은 삶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선한 억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만석은 그의 아들만큼은 그렇게(착하게) 살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들(강선동)은 아버지의 기대를 져버리고 착한 아이로 성장한다. ③초등학교 4학년 때도 강선동은 교실 뒤편에 붙여놓은 마흔여덟 개의 포도알 스티커를 빈틈없이 채울 만큼 착한 아이로 자란다. ④ 5학년 때는 희망편지쓰기 대회에서 반 친구에게 쓴 편지로 장려상을 받는다. 왼쪽 얼굴에 푸른 반점이 있는 여자아이, 단발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쉬는 시간이면 창밖만 바라보던, 가리지않 은 오른쪽 옆모습이 예쁘던 아이에게 그는 “너의 얼굴에서 나는 푸른 별을 본다고, 그 푸른 별이 널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고,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쓴다. ⑤ 같은 반이었던 제영무가 강선동의 그런 위선적인 행위를 간파한다. ⑥강선동은 연극배우가 되었지만, 극단에서 동료를 상대로 한 코인 사기에 엮여 쫓겨나듯 그만두고 실업자가 되어, 혼자 살던 원룸을 정리한다. 보증금을 받아 아버지 강만석의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다. ⑦ 아버지 강만석은 스물네 시간 동안 엄격한 나름의 규율을 세워두고 일흔아홉 평생 성실하게 살아왔으나 5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김아녜스가 죽은 후 치매에 걸려있었고, 마침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였는데, 강만석이 다니던 주간보호센터에도 확진자가 다녀가는 바람에 별수 없이 누군가 그를 전적으로 케어하지 않으며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⑧ 큰형 강진철(공무원)과 (비혼의 장녀, 학원 운영하는 누나) 강진경은 비용을 부담하고 강선동이 그의 치매 아버지 강만석을 전적으로 보살피게 된다. 문제는 “적절하고 충분한 보상, 즉 높은 수준의 부양료 지급”이었다. 단톡방을 만들어 객관적인 부양료 산정에 도움이 될만한 여러 자료를 올리고 네 개의 케어 등급에 따른 부양료를 제시한다. ⑨ 130만 원의 돌봄 비용은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기에도 하지 않기에도 애매한 금액이었다. 결국 김선동은 단톡방에 올리려고 찍어두었던 영상을 활용하기로 하고 유튜브 채녈 어쩌다 <부자유친>을 개설한다. 나름 틈새시장이겠거니 하고 그는 치매노인의 브이로그(Vlog)를 열심히 찍어 올린다. ⑩ 김선동은 <마담 케이의 비밀 정원>이라는 제목의 치매 걸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유튜버 방송을 보게 된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제영무’였다. 치매 걸린 노인은 강선동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권순영’, 제영무의 어머니였고. 

  박지영 소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스토리, 실제 일어나는 순서대로 사건(이야기)를 배열하면 앞의 메모와 같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 곧 플롯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 중증 치매에 걸린 아버지 강만석을 볼보고 있는 강선동은 7월이 되면서 ‘예쁜 노인상’을 만든다. 혼바 변기에 앉아 똥을 싸도 포도알 스티커 하나를 주겠다고, 이달의 예쁜 치매 노인상을 네 개만 받으면 연말에는 올해의 예쁜 치매 노인상을 받을 수 있다고(아버지에게)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 강만석은 아들 강선동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다만 중얼거릴 뿐이다. 염병. (그러니까 앞의 스토리 ⑦번 이후의 사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강선동의 이름에 담긴 뜻과 아버지 강만석의 바람과는 달리 강선동이 착한 아이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제시한다. 스토리 ①과 ②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어서 ⑦⑧⑨⑩의 사건들이 제시된다. 이렇듯이 플 롯은 사건, 이야기를 흩트려 놓는(재배열)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작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자유인인 우리가 자신의 주체적 삶 대신 타인의 시선에 종속된 곧 내가 진정 바라는 나의 모습이 아닌 타인(부모와 교사 혹은 동료거나 아무튼)이 바라는 삶을 추구하게 될 때 우리는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다. 박지영 소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인물 강선동이야말로 타인의 시선에 포박되어있는 인물이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착하게 살아갈 것을 강요받는다. 그는 누구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소외된 사람을 찾아 약점을 드러내고 더욱 소외되게 만드는 일, 선의라는 말로 다른 방식의 폭력을 행하고 자신은 착한 사마리아인 혹은 착한 흥부처럼 처신하는 데 그는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중증 치매 노인 아버지의 일상을 유튜브로 중계하면서 그를 이용하여 세간의 관심을 목말라하는 것, 그뿐 아니라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제영무가 역시 치매에 걸린 그의 어머니의 일상 모든 장면을 예쁘게 포장하여 거짓과 위선으로 만든 방송을 유트뷰로 내보내 구독자 수를 늘려가는 것, 모두 타인의 인정과 지지(그것이 결국 돈으로 환산될)에 목마른,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가면 뒤에 숨어 있다기보다 가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 주술을 걸어놓은 박지영 소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인물 강선동은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 있으며 그가 그렇게 믿고 있는 한 그는 정말 착한 사람인 것이다. 누구나 착한 아이가 되고싶은 것이기도 하니까, 착한 아이는 보상받고 격려받고 지지를 받으니까. 

  그렇게 누구라도 누구도 자신을 객관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미국 작가 커트 보네것은 “우리는 그런 척하는 존재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우리가 무엇을 척하는 것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속물이 되고 나면 비로소 타인의 속물근성으로 고통을 받는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강선동은 어릴 때 자신에게 “그러지 마”라고 나무랐던 제영무가 이제 모든 것을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질투와 시기와 선망이 뒤섞여 그는 고통을 느낀다. 과연 속물들끼리는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고 즉시 서로에게 증오를 느낀다. 물론 소설에서 제영무는 김선동을 알아보지 못하고 강선동은 치매(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또 다시 위선을 연기하는 것)에 걸리지만.     

 욕망의 간접화     

  원형(신화) 비평 이론가노스롭 프라이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이야말로 모든 소설의 기본틀이라고 말한다. 박지영 소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인물 강선동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위악적인 인물 유형으로 그려진다. 그에게는 어떻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삶(정체성)을 만들어갈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다. 그런데 정체성을 상실한 주인공이 정체성을 회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욕망의 간접화의문제와 연결된다.

  그네 지라느는 하나의 작품에는 여러 개의 삼각형적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는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사이에 매개자가 있다고 설명한다. 주체는 이 매개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니 결국 그의 욕망은 허구라는 것이다. 박지영 소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인물 강선동의 경우 그가 착한 사람이고자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욕망)가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억압적 구조(매개자)에 기안하는 것이 된다. 그러하니 그가 욕망하는 것(착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은 그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기에 허위의 구조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경제체제가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대체한 까닭에 필연적으로 소설의 주인공과 세계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이 생긴다. 소설의 인물 강선동은 착하게 살고자 노력하지만 그러나 그는 극단의 배우로 성공하지 못하며(집과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나면 더 이상 착한 사마리아인 혹은 착한 흥부의 법칙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코인 사기에 연루되어 극단에서 추방된다. 사십이 다 되는 나이에 중증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집에 숨어 들어 기거하다가 아버지를 돌보게 되지만, 그것으로 그가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세속적 욕망의 성취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하나는, 그에게 제영무라는 인물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모방하고자 할 때 그 모방욕망이란 결국 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다. 강선동에게 제영무는 그런 인물(욕망의 간접화)로 기능한다. 강선동은 제영무가 유튜브 세계에서 성공해나가는 것을 보고 질시와 선망이라는 양가감정을 느끼고 그를 모방하고자 한다. 급기야 엽기적인 방법으로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분장하고 훈련시켜 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내보낸다. 

  지라르의 해법은 간명하다.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는 욕망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온갖 열정을 쏟는 사람만이 허영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열정을 소유한 자만이 평등한 사회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이는 사르트르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질 것을 강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소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주제의식 역시 그러하다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허위와 가짜 욕망의 세계에서 온전한 자신의 삶(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의 소중하고 고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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