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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Feb 13. 2023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것

-「파장」과 「복도」의 경우

    이번 주 소설의 이론은 ‘소설의 서두에서 다루어야 할 것’들(소설에 대하여, 24쪽 등을 참고하시면서요)이니까 참고하시면서 공미숙 선생님 단편「파장-罷場」과 강화길 중편「복도」를 읽어보도록 하죠. 우선 이론에서 설명한 것은, 소설의 서두에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둘만 한 어떤 강렬한 인상이 필요하다, 흥미를 불러일으킬 어떤 것이 필요하다, 정해진 답이 있다 하기는 어려우나 소설은 그 안에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이 모종의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면서 주제가 자연스레 제시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소설의 도입부엔 어떤 사건의 발생으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동화도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김유미 선생님의 동화 두 편 중에서 인물의 내면 묘사로 시작하는「주전자가 끊는 시간」보다는 무언가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음을 모여주는「오즈의 나라 로시」가 더 괜찮은 시작이라고 보았던 거고요. 동화는 독자인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엔 내면 묘사보다는 어떤 사건의 암시가 더 괜찮겠다(이해 가능-흥미 유발)고 본 거고요. 

  소설의 경우에는 “아니, 곱씹을수록 기분이 나빠”로 시작하는 강화길 중편「복도」도 괜찮아 보여요. 인물의 발화를 첫 문장에 배치함으로써 소설의 어떤 지배적인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어서 그 자체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니까요. “핸드폰 벨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로 시작하는 공미숙 선생님 단편「파장」도 좋아요. 무언가 사건의 발생을 암시하는 그래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시작이니까요. 그런데 이 경우(핸드폰 벨이 울렸다)는 참신하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죠. 어디선가 소설이든 영화든 익숙하잖아요. 참, 어려운 문제지요.

  자, 이제 첫 문장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야죠. 제가 책에서, 이론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처럼 첫 단락이나 그 직후에는, 주인공과 기타 등장인물들의 신원, 대략의 나이와 직업, 정신 상태, 그(그녀)와 관계 맺으며 사건을 이끌어가는 다른 인물의 제시 등의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겠죠. 

  공미숙 선생님 단편「파장」에는 다시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 ‘나’의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일흔이 넘은 친정엄마 ‘김부덕’ 여사의 아파트 이웃인 507호 노인이 소개되고 있어요. 그 인물로부터 친정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요. 물론 소설의 주된 인물이자 화자인 ‘나’의 대략의 신원과 김부덕 여사의 일상이 제시되면서 독자는 필경 김부덕 여사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되겠죠. 강화길 중편「복도」의 경우엔 남편의 발화로부터 “작년 겨울 임대주택으로 이사 온 직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불길하게 흔들리던” 그 마음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어요. 그것은 일단 분리수거장과 관련된 문제로 짐작되지만, 인물의 주된 갈등 상황,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나죠. 공미숙 강화길 두 소설 다 이야기의 전개가 교과서적으로(인물과 그들의 관계와 그들이 처한 어떤 상황과 분위기 등을 소설의 도입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 잘 진행되고 있군요. 좋다는 뜻이죠.

  이야기를 이제 조금 빠르게 진행하죠. 공미숙 선생님 단편「파장」은 불길한 마음에 차를 몰아 엄마의 집에 도착한 내가 본 풍경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죠. 거실  한 가운데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있게 된 저간의 사정과 엄마의 낭패감,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오빠들은 무심하고 병간호를 ‘나-인애’가 떠맡고, 그런데 나는 남편과 별거 중이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거실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 슬픔을 견디던 일을 회상하고, 딱 한 달 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양병원에 입원했던 엄마는 끝내 돌아가시게 되고, 오빠들은 내가 어딘가에서 데려온 자식이라는 것을 들어 엄마의 병간호를 내가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고,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다른 환자들과 잘 지내지 못하고, 마침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해 드린 것이 회한으로 남고요. 

  그러한 서사를 진행하면서 두 가지 상징적 장치가 마련돼요. 아파트 거실의 유리문과 연한 핑크에 연꽃을 닮은 화분 속의 식물이죠. 거실의 유리문을 열다가 넘어진 엄마, 오래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거실 유리창을 열고 베란다에 나가 슬픔을 삭이던, 화분은, 화분 속의 식물이 그렇듯이 모두가 자라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중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버리는 잎들도 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고요. 거실의 유리문은 이쪽/저쪽의 경계, 곧 삶/죽음, 일상의 평온/갑작스럽게 다가온 생의 파장을 의미하겠지요. 그동안 공부했던 소설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게 내면화되어서 인물과 인물의 관계와 인물들의 상황의 제시,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관계의 이면과 상징적인 장치의 활용을 통한 주제의 깊이 등 상당한 내공을 갖춘 소설이라고 봐요. 여전히 좀 석연찮다 싶은 것은 맨 마지막 장면에서, “이번에도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통로는 이제 영원히 봉쇄됐다.”고 굳이 설명할 것은 없겠다 싶어요. 그리고 그 파장을 넘어선 새로운 시작의 작은 가능성을 보여주면 어떻까 싶기도 하고요. 소설이란 무엇보다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요. 남편과의 관계가 파장을 향해 가게 된 데 대해 독자들이 충분하게, 그럴만하다고 이해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강화길 중편「복도」는 어떤가요? 지도에 나오지 않는 집, 일 년이 지나도 결코 지도에 나오지 않는 집, 그래서 배달 기사들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곤 하는 집이라는 설정이 매우 의미 있군요. 도시 변두리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일상의 참을 수 없는 불편을 토로하고 있는 이 소설의 인물에게 독자는 상당한 공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분리수거장에서 마주한 이웃의 남성에게서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불리는 그 상황 설정이 의도한바, 안/바깥, 중심/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의 분할로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에 대한 작가의 깊은 눈이 잘 드러난다고 봐요. 그 불편과 곤욕을 감당해나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두 인물, 남편과 아내에게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 역시 잘 그리고 있고요. 그러니까 바깥과 안의 경계에는 미세하게라도 남/여라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고요. 그 옳고 그름은 토론해볼만 하지요. 다른 하나는 소설에서 화자 ‘나’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를 상정하고 있는 구성도 신선해 보이네요. 그 청자는 다름 아닌, 119호 아이죠. 내 집을 들여다보곤 하는 아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 소설의 주제에 대해서는 수업에서 이야기 나누시죠. 제 이야기는 다만 한 참고만 하시면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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