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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Mar 22. 2017

을의 자세에 대하여

첫 번째 책 출간 기회를 얻었을 때 나는 완전히 납작 엎드렸다. 첫 번째잖아 첫 번째. 편집자 앞에서 기가 팍 죽었다. 인세는 책 가격의 몇 퍼센트로 하지요 라는 말에도 그냥 끄덕끄덕. 표지 디자인이니 내부 레이아웃이니, 심지어 책 제목을 정할 때도 감히 의견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요, 그렇고 말굽 쇼로 일관했다. 


이게 2006년의 일인데, 이후 세 번째 책을 쓸 때까지 나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글을 수정해야 합니까? 냉큼 써오겠습니다. 책에 넣을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한다고요? 냉큼 찍어오겠습니다. 


편집자가 무서웠다거나 사이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좋은 분들입니다. 특히 첫 번째 편집자와는 두 권의 책을 함께 했죠) 그저 내가 을이었던 것이다. Natural Born을.


계약서 상의 날짜는 중요하다. 나에게 아주 중요하다. 등대 불빛에 의지해 밤바다를 항해하듯(거창한 비유지만) 그 날짜를 바라보며 일한다. 자, 이때쯤 1차로 끝내고 그다음엔 이날까지 수정을 하고, 추가 원고가 필요하면 이날까지 하겠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한다. 운명의 마감 당일엔 원고 파일과 사진, 그림 파일 등을 정리해 담당자에게 보낸 후 맛있는 걸 사 먹는다. 치킨도 맛있지만 역시 케익이 좋다. 지금까지 여섯 권의 책을 쓰면서 항상 이렇게 했다. 뭐, 세상 모든 작가들이 다 이렇게 하겠지, 그래야 계획대로 책이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한참 나중에 알았다. 한 편집자는 '정말 그 날짜에 맞춰 주는 저자는 처음이에요'라는 말까지 했다. 아, 네, 제가 마감에 목숨 거는 을이라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프리랜서로 일한다는 건 언제나 을로 사는 것이다. 사실 을이면 양반이다. 병이나 정일 때가 더 많다. 책 출간 제의를 받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원고를 쓰는 동안만 유일하게 갑이 된다. 이 드물고 소중한 기회를 잘 살려 쩌렁쩌렁 곤조를 부리며 갑질을 하고 싶지만 아마 그랬다가는 난 분명히 체할 것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갑질도 해본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단, 마감을 지키고 예의도 지키는 대신 의견은 당당하게 내기. 그래야 후회가 덜하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작품, 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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