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예희 Mar 27. 2017

18. 비 내리는 벨렝

4월 24일 금요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여전히 알쏭달쏭 알듯말듯 낯선 카메라를 들고 거울 속 모습을 찍어보는 1인. 영험하신 구글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은 약간 쌀쌀할 것이다 하시어 들고 온 옷들 중 따순 것을 챙겨 입었습니다. 

어제는 신트라 여행을 했으니 오늘은 리스본의 어드메를 돌아볼 계획인데









그 전에 모닝 공복을 해결해야 하지 않것습니까. 숙소 근처, 어제 맛있는 빵을 먹었던 그 곳으로 다시 갑니다요. 

빵집 앞 메뉴판을 보니 빵이랑 커피, 단것만 파는게 아니라 생선이며 고기 요리 등도 파는 모양입니다. 이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빵집이 까페, 바, 식당을 겸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빵집' 이라고 쓰면서도 이거 맞게 쓰는 건가 좀 망설여집니다. 

일단 숙소 주인 안토니오 오빠가 자기 단골집이라며 추천해 준 이 빵집의 경우는 간판에 빠스뗄라리아pastelaria, 즉 케익pastel집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외 콘페이타리아confeitaria(과자점), 까페타리아cafetaria, 까페café 등의 명칭을 혼용하는 듯 해요. 








이잉 배고픈데 단어가 뭔 상관이여









어제도 딱 요 시간에 왔던 쌍둥이들과 싱글싱글 인사를 나누는 빵집 그분. 요런 빵집은 숙소 근처만 해도 일고여덟 군데가 넘을 정도로 무척 많은데 이 집이 그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분위기도 활발한 것이 밥 먹을 기분이 납니다.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와 보니 어제 봤던 사람들이 똑같이 아침을 먹고 있네요. 여행은 꽤 자주 다녔지만 한 곳에서 체류해 본 경험이 없어, 이런 순간엔 아아 나에게도 나만의 단골집을 만들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등장한 쁘아앙









또라다torrada와 비까 두쁠라bica dupla. 또라다는 버터를 바른 두툼한 토스트이고 비까 두쁠라는 비까bica 그러니까 에스프레소랑 거의 쌤쌤인 커피 투 샷에다가 원 샷 분량의 뜨거운 물을 더한 거에요. 

오른쪽 계산서에 의하면 커피가 1.2유로고 빵이 1.3유로니까 더하면 2.5유로인 것인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면









이거 인간적으로 너허허허허무 맛있잖아!!!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대단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고 빵 두툼하게 썰어갖구 노릇 바삭하게 구워서 빠다 척척 바른 거 아닙니까. 근데 이놈의 빵대국 대빵해시대 포르투갈 아오 어쩌면 이렇게 맛있느냐 이거죠. 게다가 버터도 으엄청 많이도 발라줬습니다. 역시 칼로리는 맛의 척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열광속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시우rossio역으로 이동합니다. 호시우 광장 뒷편 피게이라 광장praça da figueira에서 트램을 타고 쩌어기 어딜 가려고 해요. 

피게이라figueira는 무화과 나무라는 뜻인데 옛날엔 요 광장에 시장이 섰고, 고 주변에 무화과 나무들이 쫙 둘러 서 있었다고 합니다... 라고 주절주절 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머 왔다 왔어 15번 트램 왔어








손목 지갑에서 교통카드를 꺼내

















분위기 있는 옛날식 나무 트램과 요런 현대식 트램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두 가지 모두 다른 이유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아직은 빈 자리가 있지만 곧 사람들이 파바바박 타게 되는데









왜냐면 요 15번 트램을 타고 30분쯤 달리면 리스본의 유~명한 관광지에 도착하기 때문임. 모두들 고개를 쭉 빼고 바라보는 창밖의 저그가 거그여. 어머 근데 비 온다... 많이 온다....









위풍당당 히에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입니다. 호시우 등 리스본 중심지역에서 좀 떨어져 있는 벨렝Belém지역은 이곳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을 비롯해 여러 유명한 볼거리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입장권도 요렇게 다양한 조합으로다가 팔고 있다웅. 그니까 각 유적지 별로 따로 살 수도 있고, 나는 어디 어디 묶어서 갈테야 하며 통합 입장권을 살 수도 있구요. 어디 보자, 저는 이 수도원이랑 무슨무슨 탑을 가고 싶으니 12유로짜리면 되겠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모두들 우산을 쓴 채 입장 순서를 기다립니다. 대기열은 요 앞에서 두 줄로 갈라지는데









요쪽 그러니까 오른쪽 줄은 수도원에 딸린 성당인 산타 마리아 대성당Igreja de Santa Maria de Belém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우 사람봐









수도원은 입장권을 사야 하지만 성당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수도원 입장 대기열은 짧은 편이에요.









라고는 해도 사람 무척 많음. 4월에도 이런데 여름 성수기에는 어떨지 어우야 살 떨립니다. 사실 저는 포르투갈에, 리스본에 여행자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왠지 조용하고 한적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아시아 국가의 여행자들은 확실히 적지만 그 외 다른 국가의 여행자들이 버글버글합니다. 실로 관광 대국.









매년 받아들이는 여행자의 수 만큼이나 그들을 위한 인프라 수준 역시 높습니다. 

포르투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난한 나라다, 돈이 없어 옛 건축물 등을 고치지 못하고 그냥 산다더라, 그래서 옛날 분위기가 난다더라 등의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는데 직접 와서 돌아다녀 보니 분명 그런 느낌을 주는 지역도 있었지만 그건 일부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어머 뭐죠 갑자기 바뀐 사진 배경은









헤헤 나 수도원 들어왔엉!









수도원 내부의 널찍한 중정을 2층짜리 회랑claustro(영어로는 cloister)이 주와악 둘러가며 감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슥 보시면 전체적으로 소 색깔이라 뭔가 수도원 다운 검소~ 금욕~ 소박~ 요런 느낌이 나는 듯 하지만









디테일을 들여다 보면 웃기고 있네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으어마으어마하게 정교한(돈 많이 드는) 디테일이 가득가득.









and 디자인 하나 해 갖고 고걸로 쭉 간 게 아니라 구석구석 다 다름. 좀 전의 기둥이랑 얘랑 쟤랑 세 가지 모두 다르게 생긴거 보이십니까. 전체적으로 소 색깔 한 톤으로 끌고 간 것은 말하자면 얼핏 보기에 소박하고 우아해 보이는데 드럽게 비싼 보테가 베네타의 가방 같은 게 아닌가 수줍게 지적해 봅니다.








아치와 기둥, 그리고 회랑 복도의 너비가 만들어 내는 깊이감 있는 로지아loggia.









뭔 놈의 소 색깔이 이래 화려한 것인가. 1501년에 첫 삽을 떠 1601년에 쫑파티를 했다니 100년 세월이 허투루 지난게 아닙니다요.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은 당시 최고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인 마누엘 양식estilo manuelino(영어로는 Manueline)을 아주 그냥 꽉꽉 눌러 담은 곳입니다. 건축 양식 이름이 왜 마누엘이냐 하면 유행 당시, 그러니까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마누엘 1세Dom Manuel I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야요.







그럼 마누엘 1세는 누구냐, 바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로 하여금 인도 항로를 개척하게 한 사람이자 브라질을 식민지로 꿀꺼덕 삼킨 사람인 것입니다. 즉 포르투갈의 가장 화려한 시절의 문을 화알짝 연 오빠인 거에요. 그러니 으쌰으쌰 앗싸앗싸 하며 뭐 하나를 지어도 돈 팍팍 써서 화려번쩍하게 지어 과시하고 싶지 않았것시요.









회랑 2층에서 꺄르륵 꺄르륵 사진 찍어줭 하고 있는 언니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 어드메에서 다른 언니가 핸드폰으로 열심히 2층을 촬영중임. 

아 증말 1인 1핸드폰, 1인 1카메라 시대라는게 아득할 만치 신기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핸드폰은 핸드폰 카메라는 카메라이던 때가 완전 엊그제 같은데 말여요. 저만 해도 카메라는 필름 그것도 슬라이드 필름이야 라고 고집을 부리다 디지털 카메라로 옮겨 왔고, 크롭 바디가 웬 말이냐 당연히 1대 1 바디에 뷰 파인더를 보며 촬영해야지 라고 지난 몇 년 간 무겁고 큰 카메라를 낑낑 들고 다니다 이번에 미러리스 카메라를 영접했으니 또 다음에는 대체 뭘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게 될지 허허 나도 모르것소. 어쨌든 가... 가벼워서 좋긴 진짜 좋구만요. 게다가 뷰 파인더에 눈을 대지 않아도 되니 눈썹도 그릴 수 있고 마스카라도 칠하고 다닐 수 있엉...(눈물) 

그나저나 쪼그려 앉고 사진 찍는 오빠 등 뒤, 벽에 난 문 안쪽은 고해실입니다. 회랑 요쪽 벽에 12곳의 고해실이 있어요.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을 반들반들 돌계단을 올라 회랑 2층으로









로지아 아치의 화려한 디테일을 보니 문득 불가리아의 릴라 수도원Рилски манастир, Rila Monastery 생각이 납니다. 쿠콰콰 세차게 흐르는 물 소리만 가득했던 깊은 숲 속의 릴라 수도원. 독실한 무종교인의 눈에서 뜬금없는 눈물을 뽑아냈던 강렬하고도 묘한 수도원. 

그런데 이곳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에서는 종교적인 에너지 대신 화려함, 욕심, 사치, 과시, 부, 권력이 느껴져요. 수도원에서 이런 느낌을 받다니 허허 좀 웃기긴 한데 한편으론 속 편하게 헤헤 이뿌당 하고 실실 웃으면서 구경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릴라 수도원은 불가리아가 어려웠던 시절 전국적 모금운동을 통해 어렵게 어렵게 가까스로 지은 곳이고 여긴 어머 우리 어떡해 막 돈이 남네? 하면서 한껏 화려하게 지은 곳이니 두 수도원의 아우라가 다를 수 밖에요.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습니다.







중정 잔디밭을 가로지른 십자가 모티브의 길









이제 보니 회랑 아치 부분의 디테일이 왠지 야자수를 연상시키는 것이, 그래서 더 흥야라 뎅야라 느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먼.









아치 위에서 물을 오웩 오웩 뱉고 있는 멍멍이 비슷한 괴 생물체들. 아 노랗구나, 아 소 색깔이구나, 아 전부 돌이구나 했다가 보면 볼 수록 재미난 디테일을 느낄 수 있는 곳. 이게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의 매력이라고 이 연사 강력하게 주장해 봅니다.









이곳의 이름이 성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이라는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수도회Ordem de São Jerónimo 의 수도원이라는 얘기 되것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포르투갈 왕실의 수호 성인이자 선원들의 수호 성인인데... 라는 것은 그 뭐냐 배 타고서 식민지 개척하러 가면서 살아 돌아오게 해 줍쇼 돈 많이 벌어오게 해 줍쇼 하고 기도하기 딱 좋은 성인인 거잖아요. 중국으로 치면 틴허우天后(마쭈媽祖) 같은 존재입니다. 









차고 넘치는 성인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수도회 중에서 성 히에로니무스 수도회를 선택한 것은 그런 절실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게 쓰다 보니 여러 수도회에서 나온 수사들이 경쟁 PT 입찰하는 모습이 상상되어 약간 웃김. 포르투갈 왕실에서 부지 딱 선정해 놓고 자자 입찰하렴 했더니 다들 PPT 만들어 갖고 오고 막... 뭔소리여 껄껄...









근데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 무려 진도 9의 엄청난 천재지변에도 요 옆 대성당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딱히 피해가 없었다니 오오 기도발이 통하나 싶기도 합니다.









하여간 그래서 대항해시대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 전 요 1층 회랑 안쪽의 고해실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떠나는게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독실한 무교신자의 입장에서는 고해라는 행위가 정치적으로 편리하게 이용되는 면이 쫌 있네 싶은데(이하생략) 오호호 꺄르르...









앞서 경쟁 PT 운운한 것은 물론 농담이고, 원래 이 땅에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섬기는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마누엘 1세 시대에 앞서 대항해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엔리케 왕자Infante D. Henrique, 일명 항해왕 엔리케Henrique o navegador가 지은 곳인데, 성 히에로니무스가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니 자자 모두들 여기서 기도를 하고 바다에 나가거라 라고 명령을 내렸대요. 그게 하나의 전통이 되어 왕자가 죽은 후에도 쭈욱 계속되었는데









1497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오빠 역시 그 작은 교회에서 출정 전날 철야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첫날 컨디션은 어쩌려고 철야를 했으까. 

하여간 그러고서 약 3년 후 어마어마한 보물을 들고 포르투갈로 컴백했으니 당시 왕인 마누엘 1세가 어우야 이것은 매우 밝은 미래인걸? 하며 필을 확 받은 것이죠. 그리하여 기존의 교회 자리에 이 화려한 수도원을 지었다는 거 아니것습니까. 예산 일부는 빵빵한 국고에서 충당하고 나머지는 수입품에 때려매긴 5%의 관세에서 충당했다 합니다.








그렇게 회랑 2층 구경을 마치고 쩌어기 안쪽으로 들어가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17. 무어인의 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