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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Mar 27. 2017

20. 달달한거 먹고 탑으로

히에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을 돌아본 후에는 고 옆쪽 동네 그러니까 벨렝Belém 지구 안으로 살짝 들어갑니다.








수도원 바로 맞은편엔 아까의 트램 정류장이 있어요. 머리 위엔 트램 전깃줄이 챠챠챡. 선 채로 사진을 찍으면 이런 모습이고









어이구 도가니야를 외치며 쭈그려 앉아 찍으면 마 이렇습니다. 전깃줄이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트램이 지나다니는 모든 지역의 하늘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고 여러 노선이 만나는 곳, 종점 등이 이렇더라구요. 

우얏든동 벨렝의 상점가 쪽으로 넘어가 보면









짙은 파란색의 차양 아래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눈에 딱 들어옵니다.









모두들 하얀 종이 쇼핑백을 한 두 개씩 소중하게 들고 나오는 그 곳. 가게 앞의 칼사다 포르투게사calçada portuguesa에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 1837 이라는 무늬가 있습니다... 라는 것은









포르투갈의 명물 달두왈인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에그 타르트)의 원조집인 것입니다요. 그래서 사람이 밖에도 안에도 요래 많음.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가 아하~ 이 긴 줄은 포장 손님들의 대기줄이었어요. 앉아서 먹고 갈 생각이라면 사진 왼쪽으로 샤샥 들어가면 됩니다. 









근데 무려 1837년에 오픈했다는 이 큰 규모의 제과점에서 오로지 파스텔 드 나타 한 종류만 만들어 팔 리는 없지 않것습니까. 온갖 종류의 케익과 파이, 페이스트리, 푸딩, 빵이랑 샌드위치 등등이 있습니다요. 입구의 쇼 케이스 안에도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그득하고 메뉴판에도 줄줄이 가득가득.









하지만 모두들 파스텔 드 나타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를 부르짖고 있음. 하기사 이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멀리멀리 와서 이렇게 줄까지 섰는데 젤 유명하다는 거 먹어야지 않겠나요. 위장 사이즈에는 한계가 있으니 우선 순위가 딱 정해지는 것이여.









경복궁 앞 토속촌에도 아구찜이니 통닭 같은 걸 팔긴 하지만 굳이~ 애써~ 거기까지 가면 고민없이 삼계탕 먹는 1인이옵니다. 

그나저나 토속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곳 파스테이스 드 벨렝이랑 토속촌이랑 뭔가 되게 느낌이 비슷해요. 이게 뭔 말이냐 하면









가게 슥 들어가서 복잡한 계산대 왼쪽으로 들어가면 은근히 긴 통로가 나오고, 그걸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요런 홀이 여러 개 나오거든요. 어라? 어라? 싶게 계속 나오는 것이, 야, 여기 겉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되게 넓고 깊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속촌도 그렇자네. 

그리고 입구 쪽의 포장 손님들 줄 보다는 짧은 편이지만 이 안에서도 역시 줄 서서 잠시 기다리긴 해야 합니다. 4월 말,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인데 벌써 이렇게 사람이 많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호호 나 앉았엉









and 다섯 개 주문했엉. 주변을 슥 둘러보니 호호 대부분 1인 1개 하시던데 호호 다들 왜 이러세요 호호 그걸 누구 코에 호호호









테이블 위에는 요런 스뎅 두 개가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시나몬 파우더, 하나는 슈가 파우더에요. 

엊그제 쿠킹 클래스에서 요 파스텔 드 나타를 만들고 먹으면서 보니까 오호 확실히 시나몬을 더했을 때 맛이 확 살더라구요. 그래서 하나는 그냥 먹고 하나는 시나몬 파우더를 뿌려 먹고 하나는 슈가 파우더를 뿌려 먹고 하나는 시나몬이랑 슈가 파우더를 모두 뿌려 먹고 마지막 하나는 제일 마음에 든 방식으로 먹었습니다... 

라는 것은 거봐 이래서 다섯 개는 먹어야 한다니깐?(라며 괜히 화냄)









와인도 한잔. 입 안이 달짝지근하면서 시나몬 스멜이 풀풀 나던 중이라 레드와인 한 모금 쓰르릅 하니 딱 좋으네요. 

그나저나 사진 속, 저 멀리 넥타이 매고 앞치마 입은 아벗님들이 이곳의 직원들인데 대부분 저렇게 아벗어멋님 연배의 분들이십니다. 공간이 넓고 테이블도 무진장 많으며 손님도 정신없이 들며 나는 곳인데 역시 프로는 프로더라구요. 연륜 넘치는 정확한 서비스.









뒷면은 요래 생겼엉. 그래서 맛은 어떠냐면 호호호... 한입 베어물면 아!주! 겹겹이 바사사라락 흩어지면서 커스터드 크림이 쌧바닥과 입천장에 촥 퍼지는 것이 디스 이즈 진짜 맛있구나 이 집이 유명한 이유가 이해 된다 라는 맛입니다. 

마카오와 홍콩에서도 파스텔 드 나타를 먹어 봤고, 엊그제 요리 수업때도 갓 만든 걸 먹었고, 포르투갈의 어지간한 빵집이라면 요건 다들 팔고 있으니 이제는 맛이 대략 평준화 되지 않았것냐 걍 벨렝 온 김에 함 가 보는 거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만요. 후회 없다 라고 부르짖으며(속으로 왈왈 짖었엉) 와구와구 다섯 개를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 









포르투갈 여행 중 다양한 달두왈을 꽤 많이 먹었는데 단 맛이 좀 많이 강해서 어우 힘들다 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신 맛이라던가 짠 맛 등이 좀 들어가면 좋겠다, 그러면 밸런스가 더 좋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도요. 섬세하다기 보다는 투박한 느낌. 그런데 이곳 파스테이스 드 벨렝의 파스텔 드 나타는 확실히 맛이 침착해서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 라고 하고 있지만 메뉴판에는 파스텔 드 벨렝pastel de Belém 이라는 고유명사로 쓰여 있습니다. (pastel은 단수, pastéis는 복수) 이 지역, 그러니까 벨렝을 대표하는 단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셈이에요.







그럼 요 파스텔 드 벨렝은 어떻게 개발된 것이냐, 일단 쩌어기 중세로 쭈욱 올라가 봅니다. 

옛날 옛적 중세 포르투갈의 수도원에선 수도사들의 옷 주름을 빳빳하게 펴는 용도로 겨란 흰자를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노른자가 남아 돌지 않것어요? 한편 당시 수도원에선 와인을 생산, 판매해 얻은 수익으로 살림을 꾸렸는데 달걀 흰자를 팍팍 저어 거품을 낸 걸로 와인의 불순물을 건져 냈습니다. 흰자가 차암 바빴겠어요. 

우얏든동 그러다 보니 수도원들 마다 남아도는 노른자로 만들 만한 음식이 뭐 있나 요리조리 연구를 했는데, 그중 이 동네의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에선 파스텔 드 나타를 개발한 것이죠! 탄생 설화(박혁거세냐...)만 보면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까눌레canelé와도 무척 닮아 있습니다. 

파스텔 드 나타는 나오자 마자 수도원 식구들에게 대 히트를 쳤는데, 야 요거는 인간적으로 진짜 맛있당 우리 수도원의 명물이야 그니까 레시피 누구 가르쳐 주지 말고 우리끼리만 길이길이 보존해야 해 라며 꽁꽁 숨겨 놓고 그 안에서만 대대로 물려 주었다고.







그렇게 세월이 주욱~ 흘러가던 어느날 허이구야 리스본에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1755년의 일. 도시 대부분이 큰 피해를 입었고 당시 왕 동 호세 1세Dom Jose I의 왕궁도 와르르 박살이 나 버렸어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왕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폐쇄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어, 지진으로 무너진 왕궁 터도 그냥 휑한 공터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코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 그러니까 호시우 광장에서 쫌만 더 가면 있는 큰 광장이야요. 동 호세 1세는 왕궁 대신 텐트 형태의 임시 거처에서 사망할 때 까지 지냈다고 합니다.(대지진 2년 후 죽었엉...) 

대지진을 계기로 으쌰으쌰 식민지를 신나게 만들며 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포르투갈의 좋은 시절도 서서히 막을 내리게 돼요. 나폴레옹에게 침공을 당하고, 영국에게 섭정을 당하는 등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죠. 당시의 왕은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후다닥 피신했구요. 

그러다 여차저차 외세를 몰아내고 왕이 다시 컴백하게 되었는데 아 맞다, 우리 원래 궁전 있던게 대지진때 완전 박살났잖아, 근데 새로 짓지 않았잖아, 그럼 왕이 돌아오시면 어디서 주무시라고 하지? 라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명색이 왕인데 관광호텔 이런 데에 방 잡아주기도 좀 그렇고 말이죠.








괜찮은 데 없나아 어디가 좋을까아 하며 그럴싸한 건물을 물색하다 보니 어이구~ 벨렝에 이렇게 자알 생긴 수도원이 있었네? 하며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을 찜하게 된 것이야요. 

그리하여 수도원 식구들은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됩니다. 부동산을 하루 아침에 뺏겼네? 왕이 무섭긴 무섭다 그죠? 드럽고 치사하다 그죠? 

우리 불쌍한 수도사들이 이곳 저곳의 수도원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사이 대대로 내려온 파스텔 드 나타의 레시피를 안주머니에 꼬옥 짱박아두고 있던 달두왈 담당 수도사는 그래 이것을 팔아야갓서 나도 먹고 살아야지 안갓디 하며 레시피를 눈독 들이던 수도원 근처 빵집 주인과 계약을 맺어 파스텔 드 나타의 제조법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837년, 이곳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이 영업을 시작한 것이야요. 현재도 총 5명에게만 레시피가 전수되고 있다니 대단합니다... 라고 쓰다 보니 헉헉 매우 숨참.

파스텔 드 나타는 한 개에 1.05유로에요. 저는 다섯 개 먹었으니까 5.25유로, 와인 쬐끄만 병 하나에 2.1유로 해서 7.35유로입니다. 파랑 하양 앞치마랑 요리사 모자, 심지어 도자기로 만든 파스텔 드 나타 모형-.-도 팔고 있으니 참고하십쇼.








혈당은 혈당대로 쭉쭉 올라오고 와인은 와인대로 훅훅 올라오는 1인은 시이뻘건 얼굴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와 아하하 나는 모른다아 아하하 기분이 좋으다아를 외치며 정신없이 걷기 시작합니다.









수도원이랑 파스테이스 드 벨렝이 있는 쪽에서 큰 길을 건너면 널찍한 공원이 나오는데 양 팔을 마구 휘저으며 걷다 보면 당분과 알코올이 분해되기는 개뿔 점점 더 훅훅 쭉쭉 올라옵니다. 

우얏든동 공원을 가로질러 빠져나가면 이건 뭐 바다여 뭐여 싶게 너얿은 강이 나오는데









못보고 지나치기가 차암 힘들게 생긴 요런 것이 쿵야 서 있으니 얘만 바라보며 쭉쭉 가면 됩니다요. 뭐 한 10-15분이면 돼요. 그럼 높이 52미터의 거대한 쎄멘... 아니 시멘트로 만든 물체에 도착합니다. 

빠드라웅 도스 디스꼬브리멘또스padrão dos descobrimentos, 영어로는 monument to the discoveries, 우리말로는 발견 기념비라는 것이야요.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여는데 큰 역할을 한 엔리케 왕자Henrique o Navegador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운 기념비입니다. 1394년에 태어나 1460년에 사망했으니 500주년이라는 것은 지난 1960년 되것시요. 

엔리케 왕자는 그 당시 상당한 진보 인사로, 탐험가들이 자유롭게 항해하며 식민지를 탐험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많이 바꾸어 준 사람입니다... 라는 것은 특혜를 마구 날렸다는 얘기임.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미래를 내다 본 영웅이고 식민지 입장에서는 이런 개새끼 소새끼가 또 없것지요. 참고로 엔리케 왕자는 '항해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데(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정작 배는 거의 타지 않았다고 해요. 

발견 기념비의 양쪽 면(사진에서 보이는 면과 뒷편에 숨어서 안 보이는 면)에는 포르투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맨 앞에 서서 배 모형을 들고 있는 게 엔리크 왕자, 그 뒤의 무릎 꿇고 큰 칼 든 바가지 머리 오빠는 알폰수 5세Dom Afonso V, 세번째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다섯번째인지 여섯번째인지 손에 둥근 거(아마도 항해에 필요한 관측 기구것지요) 들고 있는 단발머리 오빠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입니다.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를 영어식으로 쓰면 Ferdinand Magellan... 라는 것은 네 바로 그 탐험가 마젤란인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영광, 누군가에겐 자다 날벼락. 이 조형물의 이름이 발견 기념비인데, '발견'이라고는 하지만 발견당한 쪽에서는 되게 울컥할 소리겠습니다. 식민지배/피지배란 엄청난 범세계적 범죄의 결과물입니다. 힘이 있는 국가의 범죄를 주변 국가들이 묵인해 주고 심지어 동참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제가 흥미진진하게 보고 즐기는 것이 바로 그 식민지배의 흔적들이다 라는 생각도 합니다. 이 아름다운 칼사다 포르투게사의 패턴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 마카오, 인도의 고아 등에 퍼져 있고, 지금은 그 지역의 명물이 되어 관광 수익에 일조하고 있구요. 

그나저나 발견 기념비 앞 칼사다의 파도 패턴에는 물길을 열어 아시아를 정복하러 떠나자 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손에 두루마리랑 깃털 펜 쥐고 있는 오빠는 포르투갈의 역사가인 조앙 드 바로스João de Barros. 두루마리에는 그의 대표 저서 제목인 Décadas da Ásia(Decades of Asia)가 새겨져 있는데, 우리의 위대한 탐험가들이 인도양 쭉쭉 지나 인도에 도착했어요 인도를 말아먹었죠 아시아도 다 우리꺼죠 라는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라고만 쓰면 너무 욕 같으니까 좀더 자세히 써보자. 포르투갈의 인도, 아시아 식민 지배 역사와 해당 지역의 지리, 문화 등에 대한 꽤 상세한 저술입니다.









그렇게 대항해시대를 열고 이끌어 가는데 일조한 행정가, 선교사, 항해사, 천문학자, 군인 등 유명한 인물들의 모습이 기념비에 가득한데









반대편으로 빙 돌아오니 이쪽 면에도 요래 많구만요. 모두 33명입니다. 그러나 발견 기념비에 새겨진 자들은 그 중에도 권력자가 아니었을까요.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지.









리스본은 기원전 1200년경 페니키아인이 이 지역에 항구를 건설하면서 생성된 도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길고 긴 떼주 강rio Tejo이 이곳 리스본에서 대서양으로 흘러 나가니 딱 적절한 곳에 딱 적절한 항구 도시가 생긴 것이구만요. 엔리케 왕자의 시선을 따라 저 먼 대서양을 잠시 바라보다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쩌어기 저 네모진 탑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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