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거리

by 재해석


며칠 전 요양원 건물 청소 구인 광고에 지원했다.
월 220만 원.
딱 그만큼의 땀을 흘리기로 마음먹었다.


친한 동생이 다음 날 불쑥 240만 원짜리 제안을 던졌다.

자기 어머니의 수행비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에 사람을 구하는 중이라며, 나를 먼저 떠올렸다고 했다.


어머니의 사회적 호칭은 회장님이다.
흔한 종류의 회장님과는 결이 다르다.

한 시대를 자기 분야에서 오래 버텨낸 사람.
사람을 부릴 줄도 알고, 사람을 쓰는 법도 아는 사람.
그런 분의 비위를 맞출 사람으로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동생과 대화할 때는 늘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칫하면 말솜씨에 넘어가 회장님 댁 초인종을 누르게 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사람을 설득하는 데 능한 아이다.
사람 마음이 흔들리는 지점을 정확히 안다.


한 번은 목욕탕 세신사에게 극세사 이불을 선물하고도 ‘때 값은 때 값’이라며 끝내 값을 치르던 아이였다.
정과 값의 경계를 아는 사람.
그래서 더 무섭다.


정이 있는 제안은 거절하기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제안을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때도 이렇게 말했다.


“친할수록 거리가 필요하잖아. 깨지지 않을 거리를 지키는 게 나는 더 중요해. 돈이 우선이면 이렇게 살겠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명은 늘 부족했다.
상대는 대개 겸손해서 사양한다고 여겼고, 어떤 이는 복에 겨운 사람처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돈보다 먼저 무너지는 것들이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더 쉽게 금 가는 관계들.
돈이 오가는 순간 사람의 기대가 자라나는 방식.
그 기대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속도.

그 제안을 받지 못한 까닭을 설명하려면,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야 한다.


보육원에 있을 때였다.
생라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유난히 한 가지 음식만 오래 생각한다.
그날 내 머릿속에는 바삭하게 부서지는 라면 조각과 손끝에 묻는 분말수프 냄새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대신, 보육원에 들어오기 전,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 검은색 제도 샤프 하나가 있었다.
천 원이 넘는 물건이었다.
그 시절 내게 천 원은 쉽게 손에 쥘 수 없는 돈이었다.
친구에게 그 샤프를 헐값에 넘겼다.
값으로 치면 열 배쯤 싸게 팔았을 것이다.
그리고 생라면을 사 먹었다.

라면은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입안이 얼얼해지도록 먹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그런데 배가 부른 뒤에도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배고픔은 가셨지만, 내 값이 깎여나간 느낌은 오래 남았다.


그때부터 목표는 하나가 되었다.

내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만큼은 자기 값을 함부로 깎지 않게 하는 것.

가난은 늘 물건 값만 깎아 먹는 것이 아니다.
사람 값도 깎아 먹는다.


싫은 말을 들어도 웃게 만들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게 만들고, 고마워할 필요 없는 일 앞에서도 고개숙이게 만든다.
그걸 너무 일찍 배웠다.


적어도 내 아이에게만은 그 습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목표를 세우면 근처라도 가는 법인지, 서울 외곽의 꽤 부유한 집안 맏며느리가 되었다.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장남의 아내였지만, 아이는 내가 겪은 식의 가난과는 멀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람들은 결혼을 잘했다고 했다.
형편이 폈다고도 했다.
겉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겉이 전부는 아니다.


한동안 피해자로 여기며 살았다.
삶이 꼬인 이유를 남편의 장애에서 찾기도 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핵심은 아니었다.


장애가 문제라기보다, 장애를 둘러싼 집안의 공기와 역할의 배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선이 문제였다.
며느리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 사람이라기보다 기능이 되곤 했다. 돌봄, 노동, 침묵.
그 세 가지를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흉이 되는 자리.


이름이 아니라 역할로 불렸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 엄마.
한 사람의 기분보다 밥상이 먼저 중요했고, 한 사람의 피로보다 집안의 체면이 중요했다.


내가 울어도 집안일은 줄지 않았고, 아파도 해야 할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남편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장애가 없었더라면, 이 집에 오지 않았을 텐데.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덜 억울했을 텐데.


그 생각을 흔든 것은 우연히 들은 설교 한마디였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오래 남았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누구일까.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넘치는데, 가해자는 드물다. 이상한 일이다. 사람의 기억은 대체로 자기편이다. 불리한 장면은 흐려지고, 억울한 장면만 또렷하게 남는다. 내가 받은 상처는 선명한데, 내가 준 상처는 흐릿하다. 내가 참아낸 날들은 또렷한데, 누군가 내 눈치를 보며 삼킨 말들은 쉽게 지워진다.


문득 남편에게는 내가 지워버린 장면들이 선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억울해하는 동안, 누군가는 나 때문에 작아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그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사람은 자기 고통에만 몰두할 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시아버지께서 수술을 하셨다.
병간호에 돈 쓰는 일을 낭비로 여기는 시어머니 덕분에, 이십 년 가까운 별거 생활에 쉼표를 찍고 아버님 간호를 맡게 되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아도 멀다. 문을 열기 전부터 몸이 굳는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가구, 익숙한 말투가 반갑지 않은 기억을 먼저 깨운다. 그래도 갔다. 해야 할 몫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버님이 혼자서 마실 다니실 만큼 회복하실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 썼다. 밥을 챙기고, 약 시간을 맞추고, 밤에 뒤척이는 소리에 잠을 깨고, 화장실 부축을 하고, 수술 부위를 살피고, 병원에 동행했다.

누군가의 몸이 다시 제 기능을 찾는 과정은 느리고 사소한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물 한 컵, 약 한 알, 기저귀 한 장, 체온계의 숫자, 밤새 참은 신음. 간호는 큰 결심보다 작은 반복에 더 가깝다. 그 과정에서 머리로 깨달았던 것을 몸으로 다시 깨달았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때로 사랑보다 책임이 먼저 움직인다. 책임으로 시작한 일이 오래 이어지면, 그 안에서 묵은 감정들이 조금씩 자리를 바꾼다. 용서까지는 아니어도, 미움의 모서리가 닳는다.


시부모님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다. 고맙다는 말도 전보다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근본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남편에게 나는 여전히 밥만 먹여주면 일 잘하는 삼월이, 막순이 같은 존재에 가까웠다.

옛날에 불리던 하녀 이름들이 내 어깨에 덧입혀지는 기분이었다. 복녀, 분녀, 막순이, 점이같은 이름들은 실제 사람이기도 했고, 한 시대 여성들의 처지이기도 했다. 말 잘 듣고 손 빠르고 군말 없는 사람. 있어도 티 나지 않고, 없으면 그제야 불편한 사람.


그 이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그간 모아둔 돈도 거의 다 까먹었다. 시간도, 기력도, 자존심도 적지 않게 썼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적어도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목표는 지켰으니까.

아이는 내 어린 시절처럼 생라면 하나 때문에 자기 물건을 헐값에 넘기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면 내 몫의 절반은 한 셈이었다.


청소 일이든 설거지 일이든 하면 된다. 몸 쓰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삼월이나 막순이 보다 낫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누구 집안의 무명 하녀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일당을 받고 내 시간으로 노동을 파는 사람이니까.


노동은 고되지만 분명하다.
닦은 만큼 깨끗해지고, 버틴 만큼 월급이 들어온다.
애매한 기대와 보이지 않는 감정노동보다 정직하다.


살아보니 인생에는 두 가지가 함께 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하면 몸이 고달프고, 몸이 편하면 마음이 고달팠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을 어려서는 돈 얘기로만 알았는데, 나이 들수록 마음의 값으로 알게 되었다.
편안함도 결국 무엇을 내주고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가지는 지키고 살기로 했다.

스스로 생을 끝내서 남은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드는 일은 하지 않기로. 그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끝난 사람의 것이지만, 죄책감은 남은 사람의 것이 된다.

살아서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도 힘든데, 죽음으로까지 누군가의 평생을 묶어두는 일은 너무 크다. 그 문턱까지 가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벼랑 끝까지 밀리는지, 그리고 거기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잔인함만은 남기지 않기로 했다.


이제 ‘때 값’ 동생에게도 말할 수 있다.

언니는 네가 좋다.

그래서 누군가를 더는 잃고 싶지 않다. 인간의 한계를 내가 안다. 나는 결국 너와 네 어머니를 실망시킬 것이다. 사람의 기대는 현실보다 키가 크고, 그 기대 앞에서 나는 작아질 테니까.

처음엔 호의로 시작해도, 가까이서 오래 엮이면 감정은 쉽게 상한다. 일이 관계를 삼키는 순간이 온다.
부탁은 의무가 되고, 배려는 기준이 되고, 잘한 일은 금세 당연해진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누군가의 기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한 번 익숙해진 자리로 자꾸 되돌아가니까.


보육원을 나와 잠깐 식모로 살던 시절도 있었다. 바이올린 레슨비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난 적도 있었다. 실상은 내 발로 나온 셈이었지만, 갈 곳 없는 아이에게는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명보다 생존이 먼저였고, 억울함보다 잘 곳이 급했다. 다행히 여름이었다. 예배당 유아실에 긴 방석을 깔고 잤다. 아이들 찬송가 포스터가 붙은 벽 아래서,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더운 밤공기를 맞으며 누웠다. 잘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하던 나이가 있었다.


그런 날들을 지나오며 배운 것이 있다. 사람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아무리 좋은 사람 사이에도,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에도, 넘으면 서로를 망가뜨리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 내 거절을 섭섭함으로만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이를 지키려는 것이다. 우리 사이마저 불협화음이 되면, 나는 정말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살아오며 잃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떠난 사람, 끊어진 사람, 오해 끝에 멀어진 사람. 처음에는 다 괜찮다고 했지만, 나이 들수록 사람 하나 잃는 일이 예전 같지 않다. 새 인연은 쉽게 생기지 않고, 오래된 인연은 한번 금이 가면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격지심이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해도 괜찮다.
투명한 것은, 때로 가장 안전한 거리이기도 하니까.


어떤 거리는 예의이고, 어떤 거리는 사랑이고, 어떤 거리는 살아남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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