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백지수표로 내민 장래희망

by 재해석

전주시 팔복동, 회색 시멘트 건물들이 요새처럼 둘러싼 공업단지 한가운데에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었다.
왕복 2차선 신작로를 따라 걷다가 철로를 건너 우회전하면, 이층높이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이어진다.


얼굴만 한 잎사귀들이 바람에 사스락대는 소리는, 황량한 풍경 속 유일한 자연의 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어딘가 건조하다.

매연에 절어서인지, 나무의 본성인지, 플라타너스는 이름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내 기억 속 그 나무는 끝내 무채색이다.


그 시절 팔복국민학교는 한 학년이 열두 반이나 되었는데도 교실이 모자라 천막을 치고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했다.

아이들은 많았고, 교실은 비좁았고,

세상은 벌써부터 복잡해 보였다.


삭막한 풍경보다 더 시린 것은 집안 공기였다.
무능한 아빠 대신 엄마는 야구르트 배달과 화장품 방문판매까지 도맡았다.

그런데도 술 취한 아빠는 이틀이 멀다 하고 엄마 몸에 멍을 남겼다.


그런 환경에서 학교가 내민 ‘장래희망’ 조사서는 내게 백지수표다.
적어 낼 금액이 없는 사람에게 건네는 종이 한 장이다.


선생님도 예순 명이 넘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하셨다.

존재감 없는 아이가 내민 빈칸까지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꿈이 없어 보이는 아이를 당연하게 여겼던 건 아닐까.

나 역시 그게 내 몫의 숙명이라 여겼으니까.


훗날 스무 살 넘은 딸에게 결혼 생각이 있느냐 물었을 때, 아이는 되물었다.
“엄마 아빠 보고도 그런 마음이 들겠어요?”

그 말은 오래전 내가 장래희망란을 비워 제출했던 때와 닮아 있었다.


보이는 세계가 빈곤하면, 상상도 가난해진다.

그때 내가 경험한 어른의 세계는 단출했다.

주류회사에 성실히 일조하던 아빠, 안쓰러운 엄마, 길가 담벼락에 노상방뇨하던 아저씨, 그리고 버스 기사님.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더 보이긴 했지만, 그조차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눈치만은 빨랐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
구구단 외우기도 버거운 내가 그 세계를 뚫고 나갈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공부 잘해 사랑을 독차지하던 연년생 언니와 경쟁하는 대신, 나는 일찌감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언니보다 빗자루질을 꼼꼼히 하고, 고장 난 가전제품을 만지작거리고, 칠판지우개를 하얗게 털어놓는 일.

그런 세심함이 내게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재능이라 불러주지 않았다.

예쁘고 영특한 언니가 칭찬을 독식하며 자라는 동안, 나는 일찍 사회의 불공평함을 눈치챈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너무 일찍, 꿈꾸는 일의 허망함을 믿었다.


그러나 삶은, 완전히 막다른 길 앞에서도 숨구멍 하나쯤은 남겨두었다.


팔복동을 떠나 보육원으로 향하던 길 끝에 전혀 다른 풍경의 학교가 나타났다.

5학년 때 전학 간 왕궁남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두 반뿐인 작은 학교였다.

전 학년을 다 합쳐도 1반과 2반이 전부였다.

학교 앞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고, 운동장은 한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만큼 아담했다.

사방은 산과 들과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매미 소리와 여치의 날갯짓, 파란 하늘 묻은 바람이 교실 안으로 드나들었다.

매연에 절은 플라타너스 대신, 거짓 없는 계절이 숨 쉬고 있었다.

불량식품을 파는 어른조차 없던 그 순박한 미니어처 같은 세상은 내게 조용히 다시 물었다.


너는 아직도 꿈이 없니.


네 자매가 머물게 된 시온육아원 역시 생각보다 안전한 피난처였다.
때리는 아빠도, 맞는 엄마도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를 ‘고아’라 불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버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른두 살의 젊은 엄마에게 의지할 곳이 친정이 아니라 국가였을 뿐. 돌아보면 엄마는 사회복지라는 마지막 밧줄을 붙잡고 아이들을 물 밖으로 끌어올린 셈이었다.


그곳에는 동갑내기 여자아이만 열두 명이 있었다.
매일 아침 종소리에 맞춰 국민체조를 하고, 식당에 줄을 서고, 보리가 섞였지만 따뜻한 밥을 배불리 먹었다. 밥은 공짜였고, 인심은 후했다.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엉뚱한 자신감이 솟기도 했다.
걸레질만 열심히 해도 “착하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엄마가 보고 싶은 것만 빼면, 그곳은 생각보다 나무랄 데 없는 세계였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장래희망이라는 씨앗을 품게 한 분은, 백여 명 아이들의 ‘어머니’라 불리던 김정자 원장님이었다.
어린 눈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아이들에게 사랑만 주는 사람처럼 보였다. 철없던 나는 그 자리가 마냥 부러웠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멋들어진 김종신 미술 선생님을 동경하며 화가를 꿈꾸기도 했다.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양손으로 글씨와 그림을 써 내려가던 모습이 어찌나 근사해 보이던지.


결국 보육원장도, 미술 선생님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는 양아치나 폭력배를 어른의 모델로 삼지 않았다. 세상이 보여준 가장 거친 얼굴을 보고도, 그쪽을 닮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꽤 잘 자란 셈이다.


장래희망란에 백지수표처럼 빈칸을 내밀던 아이는,

낯선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조금씩 다른 계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꿈은 처음부터 거창한 직업명이 아니었다.
안전한 어른 한 사람, 제철 바람이 드나드는 교실 하나, 마음 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 하나. 그런 것들이 사람을 살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는 빈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때는 적어 낼 금액이 없어 백지수표를 내밀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안다.


장래희망이란,
처음부터 크게 써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마음 위에 한 글자씩 배워 쓰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