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시온육아원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배운 생존 전략은 합리화였다.
부모 복이 없으니 인복이라도 있을 거라는 말.
그 문장을 믿기로 했다.
앞으로 만날 모든 선생님을 무조건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어린 내가 세상과 맺은 최초의 협정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보육원 재건축 공사가 시작됐다.
한동안 우리는 식당 바닥에서 180명의 아이들과 뒤엉켜 지냈다.
예쁜 것과 폼 나는 것을 좋아하던 사춘기 소녀에게 시멘트 바닥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다.
고아라는 낙인 위에 노숙자라는 덤까지 얹어진 기분이었다.
반항하듯 읍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유랑했다.
유랑의 끝에는, 한 권 분량으로 밀린 영어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막막함에 울고 있던 내게 한 선생님이 다가왔다.
당시 스무 살 남짓이던 보모 선생님이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수십 명 아이들의 빨랫감을 손으로 빨아내던 분.
기죽지 말라고 내 어깨를 다독이더니, 당신의 침대 대용이던 탁구대 위에 엎드려 내 영어 숙제를 해주셨다.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어도,
누군가의 짐을 잠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한 아이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 고마움을 어떻게든 갚고 싶었다.
잡지에서 모델들이 입은 근사한 옷들을 오려 모아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 나중에 돈 벌면 이 옷 꼭 사드릴게요.”
그 약속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박제되어 있다.
중년이 된 지금도 라디오에서 그 시절 듣던 팝송이 흐르면,
차가운 식당 바닥의 감촉과 탁구대 위에서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가 되살아난다.
옷 한 벌 사드리지 못한 미안함에 선뜻 연락하지 못한 날들이 길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선생님이 내게 준 것은 숙제 대필이 아니었다.
그날 내게 건네진 것은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아이야”라는 문장이 적힌, 보이지 않는 상장이었다.
그 상장을 품고 산다.
넘어질 때마다 아주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듯,
세상이 완전히 나를 버린 것은 아니라는 듯,
그 문장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빛났다.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겠다는 다짐,
상처를 다르게 해석해 보려는 자세,
그날 탁구대 위에서 처음 받은 그 마음 때문인지 모른다.
언젠가 내 용기가 조금 더 단단해지는 날,
햇살 잘 드는 창가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아 꼭 말하고 싶다.
선생님,
제 인생의 첫 페이지를 대신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