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가출은 보육원 생활 2년 차, 중학교 1학년 때다.
시설이 싫어서 뛰쳐나간 건 아니다.
가만 보니 내 걱정은 벌써 담장 밖에 가 있었다.
퇴소 뒤가 막막했다.
엄마도 가난해서 우리를 맡겼다.
궁핍이 쉽게 걷히지 않으리라는 걸, 어렸지만 안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모아야지 했다.
한 푼이든 두 푼이든 내 앞날에 쥐여 줄 비상금 같은 것.
시온육아원은 목사님이 세웠고, 목사님이 떠나신 뒤엔 사모님이 자리를 이었다.
아들이 생활지도를 맡았다.
그 시절엔 그런 식이었다.
그의 방식은 거칠었다.
다음 시험 점수를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못 미치면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후려쳤다.
나도 맞았다.
여자아이라고 봐주는 법은 없었다.
폭력이었다.
보육원에서 맞는 매라서 더 사무쳤다.
그런데도 그를 끝까지 미워하지 못했다.
그는 읍내에서 비디오 가게를 했다.
홍콩 영화 신작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우리를 식당에 불러 모아 틀어 주었다.
매질 다음 날이면 때렸던 손으로 성룡과 홍금보를 보여 주는 사람.
미안하다는 말을 비디오테이프로 대신하는 사람.
낯설지 않았다.
아빠도 그랬으니까.
엄마와 우리를 두들겨 팬 다음 날이면 죄책감에 눌려 지나치게 다정해졌다.
아주 일찍부터 그런 모순을 견디며 컸다.
그래서 아이는 스스로를 속인다.
내가 공부를 잘했어야지.
맞을 만하니까 맞은 거야.
사람 만들려고 드는 매겠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 틈에서 어린 결론을 내렸다.
아, 나는 공부로는 못 살아남겠구나.
일찍 돈을 벌어야겠다.
그 무렵, 나와 나란히 멍이 들던 아이가 있었다.
보육원에서 열네 살 인생 처음으로 사귄 친구, 현미였다.
사춘기가 병이라면, 내 사춘기는 울지 않는 병으로 왔다.
살이 부어오를 만큼 얻어맞아도 울지 않았다.
현미는 달랐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를 욕을, 어른보다 더 찰지게 뱉으며 울었다.
미친 새끼, 또 무슨 새끼, 숫자가 포함된 욕까지 섞어 가며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어린애가 어떻게 저렇게 욕을 잘하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우리는 예약된 매를 맞기 위해 나란히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다.
현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난 오늘만 맞으면 끝이야.”
공부하기로 작정한 줄 알았다.
짐작은 빗나갔다.
현미는 보육원을 떠났다.
국민학교 졸업했으면 자기보다 낫다며, 엄마가 데려가 버렸다.
우리 엄마의 기준보다 훨씬 낮은 목표치에 나는 어이없어 놀랐고, 동시에 부러웠다.
매를 피하고, 엄마와 살게 된다는 건 부러운 일이었다.
그해 여름, 앓듯이 현미를 그리워했다.
더는 마음에 드는 친구가 없었다.
지금도 피부가 하얀 아이를 보면 떠오른다.
현미는 파란 티셔츠가 잘 어울리던 하얀 아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열네 살 인생 처음으로 우표 붙은 편지를 받았다.
현미에게서였다.
문구점에서 샀을 법한 꽃무늬 편지지.
맞춤법은 삐걱거렸지만, 그 종이엔 나의 그리움과 꼭 닮은 그리움이 있었다.
잘 울지 않던 내 사춘기를, 그 편지 한 장이 울게 만들었다.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첫 월급 타면 보육원으로 만나러 오겠다고 했고 동생에게도 안 쓴 편지를 내게만 쓴다고 했다.
태어나 처음 써 보는 편지라며, 맛있는 걸 사 줄 테니 먹고 싶은 걸 생각해 두라고 했다.
그 어린애가 학교대신 공장을 다니면서도, 그리운 마음을 접어 봉투에 넣고 우체국까지 가서 부쳤다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렸다.
답장을 썼다.
그에 못지않은 그리움을 눌러 담아 보냈다.
또 보냈다.
현미는 오지 않았다.
편지도 끊겼다.
소식도 사라졌다.
주소를 잘못 썼나.
아픈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궁금증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침 그 무렵, 엄마가 다녀가며 용돈을 쥐여 주었다.
그 돈이 내게는 간식값이 아니라 현미를 찾아갈 차비가 됐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주소 하나만 들고 그 아이를 찾아냈다.
일찍이 사립탐정을 했으면 대성했을 아이다.
헤매고 또 헤매다 마침내 대문 앞에 섰다.
조심스럽게 불렀다.
“현미야…”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현미를 꼭 닮은 여자가 나를 훑어보았다. 표정부터 못마땅했다.
“누구냐?”
이름을 대자, 여자는 짧게 잘랐다.
“현미 일 갔다.”
근처 공단이라고 했다.
또 걸었다.
한참을 걸어 메리야스 공장에 닿았다.
현미를 찾자, 잠시 뒤 삼각형 두건을 쓴 아이가 나타났다. 현미였다.
나를 보자마자 현미가 울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남자 반팔 메리야스를 뒤집고 있었다.
이유는 흐릿한데 장면은 선명하다.
어린 손으로 반소매를 뒤집던 감각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일이 끝난 뒤, 현미는 집으로 데려갔다.
보육원 친구라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현미 엄마가 불같이 쏘아붙였다.
“ 당장 보육원으로 가! “
아마 군식구 하나 더 붙을까 겁이 났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그날 현미는 나와 함께 집을 나왔다.
엄밀히 말하면 가출보다 쫓겨남에 가까웠다.
낯선 골목 어둠 속에 친구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현미가 따라 나온 것이다.
그 밤, 우리는 동네 교회를 찾아갔다.
아이를 많이 낳던 시절이라 작은 예배당에도 유아실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 시절 예배당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내가 평생 교회 유아실에서 세 번 잤는데 그날이 첫 번째였고 언제나 무료였다.
그 좁은 방에서 현미는 털어놓았다.
월급을 엄마가 가져가 버려 약속을 못 지켰다고.
내 답장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아마 엄마가 없앤 것 같다고.
내가 보낸 그리움이, 현미에게는 한 번도 닿지 않았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그 밤 우리는 보육원에서 배운 어설픈 기도를 하고 미래도 짰다.
현미가 다니는 공장에 나도 들어가기로 했다.
기숙사가 있으니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다음 날 아침, 쫄쫄 굶은 채 현미를 따라 공장으로 가서 메리야스 반팔을 뒤집고 있었다.
그때 사감 선생이 들이닥쳤다.
현미 엄마가 신고한 것이다.
우리는 제법 영리했지만 동시에 똥멍청이였다.
세상의 허점은 잘도 들춰내면서 우리 계획의 허점은 못 봤다.
우리는 미성년자였다.
그는 나를 끌고 돌아갔다.
현미와 제대로 인사 한마디 못 한 채 헤어졌다.
그게 현미와의 끝이었다.
돌아오자 나를 사무실 앞 차가운 시멘트 복도에 무릎 꿇렸다.
두 손을 들고 있으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설명은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해 새벽에 돌아왔다.
그때까지 꼼짝도 못 하고 벌을 섰다.
일어설 수 없게 다리가 굳었다.
다른 선생님이 질질 끌다시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억울했다.
내가 뭘 했는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친구를 찾아갔다.
돈 벌 궁리를 했다.
보육원보다 먼저 세상으로 뛰어들 생각을 했다.
그 모든 걸 안다.
왜 그 벌을 받아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외박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 말해 주면 될 일이었다. 데리러 간 자동차 기름값만큼 네 몸으로 갚으라는 뜻이었다면 그렇게 말해 주면 될 일이었다.
어른들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잘못만 남기고 설명은 지웠다.
그때 처음 알았다.
설명 없는 벌은 매보다 오래 남는다.
그날 복도에 세워 둔 벌이, 두 번째 가출의 끝이 아니라, 세 번째 가출의 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