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북부 산간지방의 겨울은 매섭다.
난방하지 않으면 한겨울 실내 온도가 6도까지 떨어진다.
온수매트 위에서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거나, 난방텐트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건 동정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남을 고발하는 척하며, 나를 고발하려 한다.
엄마와 같이 살 게 된 건 서른일곱 해 만이었다.
“느그 엄마는 느그들이 모셔라. 우리 아부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게. “
엄마에게 어머니라 부르던 세 번 째 아빠의 자식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로 엄마와 난소암이 우리 차지가 됐다.
남도의 여름에 엄마의 살림을 걷어냈다. 삼십 년 가까이 묵은 집에서 1톤 트럭 한 대 분을 골라내고, 항아리와 감나무를 남겨 둔 채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드디어 딸들 곁으로 가게 됐다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노오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내가…”
그 노래가 그렇게 구슬플 줄 몰랐다. 엄마는 쫓겨난 게 아니었다. 탈출이었다. 난소암은 엄마에게 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담뱃불에 팔이 지져지고 머리카락이 뜯겨도, 사위들 보기 부끄럽다며 버티던 사람이었다.
그 무렵 통장 잔고는 80원이었다. 엄마와 함께 살 집을 구하려고 대출까지 받아 깊은 산속 작은 집을 샀다. 눈이 오면 갇히는 게 당연한 곳이었다. 엄마는 한적한 곳을 원했고, 그 뜻을 따랐다.
그해 겨울, 집 안에서도 오리털 파카를 입고 지냈다. 난방비가 무서워 보일러를 못 틀었다. 한 달에 80만 원쯤 나온다는 말에 겁부터 났다. 엄마도 괜찮다고 했다. 난방해봤자 건조해지기만 한다며 웃으셨다.
그러던 밤, 엄마에게 장폐색이 왔다.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얼마 전, 나 역시 비슷한 통증을 겪은 적이 있었다. 난소 수술 뒤 요관이 손상돼 스텐트를 넣었고, 그게 막힐 때마다 콩팥 쪽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몇 번이나 견뎠다. 아는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건, 모르는 통증보다 더 끔찍했다. 하물며 그 사람이 엄마였다.
병원에서는 콧줄을 꽂고, 위에 고인 걸 빼고 굶긴다. 며칠 버티다 방귀가 나오면 장이 다시 움직인다. 그 신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원리를 자세히 보고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병원까지 가는 관외 구급차 비용이 25만 원이었기에 자주 발생하는 장폐색에 대비해야 했다.
그 해 겨울 밤, 실내 온도 6도인 2층 화장실 옆 바닥에 엄마를 눕혔다. 커피 관장이란 걸 알고 준비한 상태였다. 급히 물을 데워 체온 비슷하게 맞춰 커피물을 만들고, 관장 기구를 꺼냈다. 유기농 커피라는 사실만 의지했다. 무슨 짓이든 해 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관장 줄을 넣다 빼는 사이 오물이 튀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통증만 멎길 바랐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래쪽 문제가 아니었다. 위와 장 사이 어딘가에서 막힌 걸, 거기까지는 뚫어낼 수 없었다. 문득 구토가 떠올랐다. 추위에 떠는 엄마에게 손가락을 넣고 토하라고 했다. 잔인한 말이었다. 엄마는 괴로워했지만 효과가 있었다.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엄마와 같이 굶으며 방귀를 기다렸다. 병원에서처럼, 마침내 방귀가 나왔다. 그 신호 하나로 살아났다.
엄마와 둘이 그 밤을 버텨낸 과정은 잔인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더 끔찍한 건 따로 있다. 언니에게도 누구에게도 돈을 빌려 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다.
난방비가 없다고,
엄마가 아프다고,
혼자서는 버티기 어렵다고,
같이 있어 달라고 하지 못했다.
언니는 유학 중이었다.
유학 간 사실을 엄마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형부와 이혼 위기에 처해 임시방편으로 잠시 떨어져 있기로 한 거였다.
묻지 않았다.
갑자기 유학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왜 하필 지금이냐고. 우리에게 올 수는 없냐고.
묻는 대신 선을 그었다.
“알았어. 비밀로 할게.”
내 이중언어의 행간엔 늘 비밀이 있다.
정작 해야 할 말은 삼키고, 엉뚱하게 순한 말만 남긴다.
선을 긋고, 또 긋고, 여러 겹으로 엉키면 어느 날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린다.
원래도 소심해서 억울하다고 받아치지 못했다.
우리 애랑 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말보다 눈치를 먼저 배운다.
미리 겁먹은 개처럼 짖기만 한다.
예쁘게 부탁하는 법도, 제때 화내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언니, 지금 내 통장이 텅 비었어.
난방도 못 하고 살아.
조금만 도와주면 나중에 꼭 갚을게.
같이 있어 주면 좋겠어.
이 말이면 됐을 텐데.
가난보다 먼저 입을 막는 게 있다.
오래된 두려움이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더 큰 말이 되돌아와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 것 같은 두려움.
부탁했다가 거절당하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그 밤에도 보일러 대신 입을 잠갔다.
오늘의 고자질은 여기까지다.
남 얘기처럼 시작했지만, 내 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