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붉은 낙인

by 재해석

“얘, 그것 참 이상하다. 나는 안 예뻐 그런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거든. 넌 예뻐서 그런가?”


내 과거를 얼핏 들은 분이 던진 말이다.

내가 예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예쁜 애들이나 겪을 법한 일을 예쁘지 않은 아이도 겪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맞다.

한 아이가 평생 한 번이나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이 내겐 끊임없이 몰아쳤다.


왜 내 앞에 나타난 남자 어른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비루했을까?

왜 학교는 아이를 붙잡아 주는 대신 더 밀어냈을까.


가출 문제로 수업 일수가 모자란다며 퇴학과 자퇴 중 하나를 고르라 했다.

언제는 글씨 잘 쓴다며 수업도 빼먹게 하고, 학습용 궤도를 혼자 다 그리고 쓰게 했으면서, 이제 와선 학교를 떠나란다. 목이 막혔다. 저 번 가출의 계기를 제공한 것도 학교였지만 학교는 모른 척했다.


보육원 아이들 옷은 선택할 수 없다. 사 주는 대로 입어야 한다.

그날 하필 멀쩡해 보인 옷이 빨간 티셔츠였다.

아침 조회 시간, 담임인 문 선생이 나를 검지로 찍었다.

저요? 하고 쳐다보자 손가락을 뒤집어 안으로 까닥였다.


“니가 빨갱이야?”

뺨을 휘갈겼다.

교실 한가운데로 밀려났다.

내가 입은 옷이 왜 금기인지 알 리 없는 아이였다.

어른들이 만든 이념의 잣대가 아이의 어깨에 올라타는 순간, 아이는 슬픔보다 먼저 세상을 비웃는 법을 배운다.


빨간색이 북한을 상징하는 색이라면, 나를 때린 문 선생의 손바닥도 붉어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어른들의 세계는 편리했다. 옷 색깔 하나로 낙인찍고 뺨 때릴 명분까지 만들어 냈다.


친구들 앞에서 맞은 수치심은 분노로 바뀌었지만, 분노를 내놓을 데도 없고 위로받을 곳도 없었다. 친구들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불붙은 장작 같았을까. 내가 입은 건 공산주의 색이 아니라,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시뻘겋게 멍든 마음이었다.


손자국만큼 뺨이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정말 빨갱이 때문이라면, 차라리 빨갱이라도 되고 싶었다.

단 맛은 없고 짠맛만 나는 잔멸치볶음과 시어 빠진 김치 몇 조각이 담긴 도시락이 창피해서 도시락을 안 가지고 다니던 아이다. 점심시간이면 운동장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웠다.

문 선생과 수돗가는 한 덩어리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미음 히읗 치읓이 모음인 그 이름.

그 시절 선생들의 폭력을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됐지만, 그건 교육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체육복을 못 산 무용시간에 체육복을 안 입었다며 무용선생이 30센티 자를 세워 손등을 때렸다. 봉분처럼 시퍼렇게 부어오른 손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사과받을 수 있을까, 잊을 수 있을까.


그때는 다 그랬다고 했다.

그래, 그때는 다 그랬다니까.

그러니 묻고 살라고?

그게 억울하면 성공하라고?

그걸 반면교사 삼아 바르게 잘 살면 된다고?

하나님께 벌 받았을 거라고도 했다.

네가 복수해 봤자 뺨이나 때리고 욕이나 하는 거지만, 하나님은 천둥 번개를 다루시니 하나님께 맡기라고, 기도로 일러 바치라고 했다.

19세기 코딱지 파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런 거다.

그런 선생을 매일 마주 보는 일이 끔찍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부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부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 식모살이였던 거다. 결국 다시 돌아와 퇴학당할래? 자퇴할래 소리를 듣게 됐지만.


퇴학과 자퇴 중 선택하라는 말 앞에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학교 다닐 수 있어요?”

엄마가 우리를 보육원에 보낸 이유가 고등학교 졸업이란 사실만은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목적달성을 위해 중학교 졸업이 먼저였다.

자퇴를 해야 복학할 수 있다고 했다. 무슨 차이인지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읍내에 가서 아빠 이름의 목도장을 팠다.

아빠가 쓴 것처럼 자퇴서를 꾸며 제출했다.

그 모든 걸 왜 내가 직접 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보육원 아이였으면 보육원에 통보했어야 했다.


왜 그런 건지 당시의 나는 더 몰랐지만, 중학교 졸업을 목표로 이상한 짓이지만 씩씩하게 해냈다.

중학교 자퇴자가 된 나는 보육원에 있을 수 없었다.

대놓고 나가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전주에 살고 계신 아빠에게 갔다.

때리는 아빠든, 술 취한 아빠든, 갈 데 없는 아이가 갈 곳은 그 곳 뿐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