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일곱 장의 반성문

by 재해석


내가 본 어른들이 전부 쓰레기는 아니다.
이번에는 나를 살린 어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보육원엔 아름다운 선생님들이 있었다.
김춘미, 장미순, 이명옥, 한성례, 장미경.

스무 살을 조금 넘긴 그녀들은 각자 다른 빛을 가졌고, 남은 나날의 지침서 같았다.

겨우 이십 대였지만, 그들은 어른이 되기를 서두른 아이의 까다로운 눈을 통과했다.
지금도 실명을 밝힐 수 있을 만큼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은 내게 종종 악마를 보냈지만, 천사를 한꺼번에 보내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을 먼저 말하고 싶다.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 1호, 오선자 선생님이시다.


중학교를 자퇴한 뒤, 아빠 집 근처 학교로 옮겨서 남은 1년을 다녔고, 결국 졸업했다.

한 살 아래 아이들과 같은 반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복학과 동시에 전학을 택한 건, 사춘기의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보육원을 벗어나 아빠와 산 일은 오래도록 후회했다.


길을 잃고 헤매다 찾아온 딸에게도 아빠의 폭력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생과 언니가 버스를 갈아타며 찾아와도, 술에 취해서 엄마와의 이혼을 말리지 않은 게 우리 탓이라며 몰아붙였다.


비 오는 날, 마당에서 동생과 언니를 짓밟는 모습을 보며 사람을 찌르는 상상을 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죽을 것 같아 못했을 뿐이다.

비슷한 사건이 뉴스에 나오면, 성공한 자식을 이해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방어할 수도 없는 폭력 앞에서 어린 딸들은 비명조차 잃는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 잠옷 네 벌을 사 왔다.
웃지도, 고맙다고도 못 했다.
내가 배운 선물은 기쁨이 아니라 보상이었다.
미안함의 잔돈 같은 것이었다.
아빠는 월남전 후유증이라 했고, 우리는 그 말을 핑계처럼 외워야 했다.


등교를 앞둔 전 날 밤 아빠가 또 술에 취해 전깃줄을 여러 겹 꼬아 채찍처럼 휘둘렀다.
맞다가 옆집으로 도망쳤다.
옆집 아저씨는 아빠와 가끔 술을 마시던 사람이었다.

이웃이라곤 그 집뿐이었다.
절망의 바닥에 주저앉은 내게, 그는 또 다른 더러운 돌을 던졌다.


더는 숨을 곳이 없던 날엔, 아빠가 잠들 때까지 집 앞 양계장에 숨었다.
닭똥과 왕겨가 뒤섞인 바닥에 엎드려 닭들과 눈을 맞췄다.
그 밤의 냄새와 기억을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다.


다음 날이 전학 간 학교의 첫 등교 일이었다.
전날 맞은 자국이 얼굴 여기저기에 붉고 푸르게 올라 있었다.
그 얼굴로 교실에 들어갈 수 없었고 주머니엔 수업료가 있었다.

어디든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다.
이 땅에서 가장 먼 곳, 제주도로 도망치겠다고 마음먹고 목포행 기차를 탔다.


목포역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혔다.
청소년 선도위원장 완장을 찬 아저씨였다.
책가방을 멘 중학생이 대낮에 역을 서성이니 뻔했을 것이다.

중학교는 졸업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다.

피 같은 내 돈으로 목포에서 전주까지 택시를 타고 학교로 끌려왔다.

담임인 오선자 선생님은 가방 속을 확인하더니 정학을 내렸다.

“하루에 한 장씩 반성문 써서 제출해라.”

왜 가출했는지.
왜 가방에 담배가 들어 있는지.
그 두 가지는 꼭 쓰라고 했다.


그렇게 일곱 장의 반성문을 썼다.
말하기 싫은 거짓말과 진실을 반반씩 섞어서 썼다.
살기 위해 쓰던 문장이 처음으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했고,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갑상선암 수술 뒤 동위원소 치료를 받고 나서는 침샘이 굳어 버렸다.
침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수분 없는 음식은 입안에서 시멘트처럼 굳었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긁어내야 했다.
이비인후과는 치과로, 치과는 다시 이비인후과로 나를 돌려보냈다.
아무도 관심 없다는 사실이 병보다 더 아팠다.


서울에서 양평으로 요양을 핑계 대고 딸만 데리고 이사를 했다.
딸이 전학 온 강상초등학교는, 내가 열두 살에 보육원으로 가며 다녔던 왕궁남국민학교를 닮아 있었다.
딸도 열두 살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보내온 가정통신문에 ‘경기도교육청 주최 스승의 날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침샘이 부어 오른 통증을 잊고 싶어 학부모 부문에 응모했는데 며칠 뒤 교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가출을 네 번이나 했고, 개근상은커녕 정근상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내가 경기도 전체 학부모 부문 1등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당장 학교로 와 달라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교장실에 앉았다.
교장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오선자 선생님, 찾으신 적 있으세요? 알아보니 전주에 있는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셔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통화해 보시겠어요?”


거짓말 같은 상황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리운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 1호.
오선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 앨범에 꽂아 둔 반성문 일곱 장, 아직도 갖고 있어.”


오래 참아 온 울음이 터져 버렸다.
딸 학교 교장실에서, 아이처럼 코를 풀며 울었다.
교장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시며 갑 티슈를 통째로 무릎 위에 올려 주셨다.


누군가는 나를 문제아로만 봤고,
누군가는 내 담배를 불량하게만 봤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도망친 아이가 써낸 일곱 장의 반성문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아이가 더는 사라지지 않도록 한 장의 종이를 끝내 붙들고 있는 어른이었다.





2011년 경기교육 여름호에 실렸다며 자랑 중.

지금 읽어보니 한 문장 길이가 구렁이보다 길어서 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