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는 대신 돈을 버는 현미 생각이 날 때마다, 보육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 애처럼 되려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중3 여름방학, 기말고사 성적으로 또 매를 맞고 미영이네 집에 눌러앉았다.
나름의 저항이다.
친구 집을 전전하며 배운 게 있다.
엄마라는 사람도 다 같은 엄마가 아니라는 것.
중1 때, 국민학교 교사였던 친구 엄마는 내가 보육원 아이인 걸 알고 내 앞에서 대놓고 말했다.
쟤랑 놀지 마라가 아닌, “우리 애랑 놀지 마라.”였다.
그 한 끝 차이가 더 서러웠다.
내가 포함된 우리가 없는 아이처럼 느껴졌고 그 당시엔 사실이었다.
내 편을 들 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내 편에 굶주려 있었다.
나를 가르치던 정의가 악취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이라 불리던 어른이 그어버린 금 밖으로 속절없이 밀려났다.
세상의 질서가 한순간에 뒤집혀 발 밑이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친구와 나누던 웃음은 순식간에 죄가 되었고,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 잔인한 선언을 통해 처음 배웠다.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는 외딴섬이 된 것 같았다.
미영이네 엄마는 달랐다.
따순 밥을 먹이고, 눈을 맞추고, 웃어주었다.
농사일이 산더미인데도 밥값 하라는 눈치 한 번 주지 않았다.
미영이 언니들도 정이 많고 유머가 넘쳐, 친동생 대하듯 스스럼없이 챙겨주었다.
칠판 앞의 정갈한 손이 내민 것은 거절이었다.
밭일로 거칠어진 미영이 엄마의 손은 따듯한 밥 한 공기를 밀어주었다.
배운 자의 언어가 흉기가 되어 나를 도려낼 때, 흙 만진 자의 침묵은 부서진 내 마음을 가만히 덮어 주었다.
품위는 벼슬이 아닌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로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영이 엄마와 나눈 대화가 또렷하지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 생각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중학교 졸업보다 취업이 먼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셨고, 대신 보육원에 절대 신고하지 말라는 다짐에도 끄덕여 주셨다.
곧장 친척집에 전화하셨다.
다음 날 보따리 하나 없이 순창으로 갔다.
약국을 하는 집이다.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할 줄 아는 게 많지 않아 집안일부터 배워야 했다.
약사 사모님은 후덕한 인상이었고 말씨는 점잖았다.
중1 딸과 아래로 세 살 터울 아들이 있었다.
약국 일을 돕는 언니와는 한방을 썼다.
그 언니는 말수가 적당했고, 손길이 다정했다.
둘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귀엽다”, “동생 생겨 좋다” 같은 말을 소곤소곤 들으며 잠들었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드물어서 밤마다 낯설었다.
그 집에서 처음 배운 건 탕수육이었다.
내가 먹어온 게 반찬이라면 그 집 주방에선 요리가 나왔다.
탕수육은 어려웠지만 청소는 쉬웠다.
장로님 댁에서 단련한 전력이 있어서 걸레질과 쓸기는 몸이 먼저 알았다.
대체로 무난했다.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청보리 밭 그림을 볼 때면 두고 온 자매와 현미가 떠올랐으나 마음 한쪽은 잠잠했다.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결심이 단단했으니까.
눈 질끈 감고 걸레에 힘을 실었다.
문제는 그날 밤 생겼다.
딸아이가 바이올린 개인 교습을 받는 날이었다.
책상 위에 하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레슨비겠거니 했다.
장로님 댁에서 봤던 봉투가 떠올랐다.
그때는 돈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일이 필요했다.
더는 물러날 데도 없었다.
손대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젖은 걸레질로 눅눅해진 책상에 종이봉투를 다시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봉투를 책꽂이에 비스듬히 꽂아두었다.
대신 잘 보이도록 살짝 튀어나오게. 내가 한 건 그게 전부였다.
그날, 봉투가 사라졌다.
분명히 보이게 꽂아둔 봉투였는데 감쪽같이 없어졌다.
사모님은 곧장 내 방부터 뒤졌다.
옷 주머니를 뒤지고, 어디 숨겼느냐고 쏘아붙였다.
소심한 성격이라 억울해도 받아치는 재주가 없었고, 당황하면 도망부터 치는 쪽이라 입술만 더 세게 깨물었다.
(여기서 잠깐 밝혀둘 게 있다. 장로님 댁 헌금 봉투를 훔쳤다고 자백한 나다. 그러니 또 그랬겠거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아니다. 봉투 안에 얼마가 들었는지 보지도 않았다.)
약국 보조 언니는 사모님 친정 쪽 친척이었고, 그 집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남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억울하다는 게 뭔지 그날 처음 알았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도둑으로 몰린 게 분한 것도 아니었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건, 내 입으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 말이 힘을 못 가진다는 사실이었다.
보육원에서 온 아이의 말은, 그 집 식구의 말 앞에서 애초에 같은 무게로 놓이지 않았다.
식모 사는 아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순간에도 가장 먼저 의심받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때 알았다.
그 집에 더 머물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내 얼굴값이 점점 싸진다는 걸.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얻는 대신, 스스로를 의심받아도 되는 아이로 내맡기게 될 것 같았다.
누가 쫓아낸 것도 아닌데, 그 방에 다시 누우면 정말 그런 애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그런 아이로 남지 않는 일이 더 급했다.
그날 밤,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약국집을 뛰쳐나왔다.
늦은 시간이라 갈 곳이 없었다.
이미 교회 유아실에서 무료 숙박한 과거가 있기에 교회부터 찾았다.
교회의 불 켜진 빨간 십자가는 찾기가 쉬웠다.
예배당 문이 역시나 열려 있었다.
늦은 밤 유아실에 불이 켜져 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불빛은 서러운 아이를 기다려 주는 듯했다.
어루만져 줄 것 같았다.
벽에 붙은 예수님 그림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아래 몸을 구겨 넣었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더욱 몸을 웅크렸다.
이불도 베개도 없는 바닥이었지만 좁은 유아실은 날 안심시켰다.
내 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았고,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죄로 정하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색종이 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희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그 집 사람들이 나를 보육원 출신에다 중학교도 못 마친 아이로 내려다본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돈 몇 푼 벌겠다고 국졸로 눌러앉으면, 평생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있겠구나.
대졸은커녕 중졸도 아닌 처지였지만, 중학교 졸업해야 대학도 가는 거다. 뜬금없이 학벌 생각이 났다.
그제야 알았다. 이번 가출은 실패가 아니라, 학교로 돌아가라는 경고였다는 걸.
하나님이 계신 건가 싶었다.
필요할 때만 돈을 쥐여 주시고, 필요 없을 때는 주지 않는 분인가 싶었다.
처음엔 차비하라고 돈을 주시고, 이번엔 돈 봉투에 손대지 못하게 막아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시는 건가 싶었다.
날이 밝자마자 교회 유아실을 나왔다.
바르게 인사라도 하고 나왔어야 했나 잠깐 망설였지만, 발길을 돌리진 않았다.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 억울함을 설명하는 일보다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먼저였다.
하마터면 평생 식모로 굳을 뻔했다.
보육원은 자꾸 떠나게 했지만, 돌아갈 때마다 문이 열려 있었다.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도 벌을 주지 않았다.
스스로 돌아왔으니, 자수해서 광명 찾은 셈 치신 거다.
멀리 가는 것만이 도망은 아니다.
어떤 도망은,
되돌아가야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