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
‘나만의 작업실은 어디인가요?’
회사에서 작업하는 인하우스 번역가가 아니기에 주로 번역 일은 어디에서 하는지, 가장 집중이 잘 되는 곳은 어디며 추천해줄 만한 장소는 어딘지 알려달라는 말을 듣는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8할은 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을 할까 망설인다. 집이라고 하면 왠지 실망할 것 같아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어 가끔은 카페에 간다고 말하는데(진짜이기도 하고), 사실 나는 카페에서 일을 잘 못한다.
카페는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페 = 공부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음료와 함께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며, 이런 포괄적인 개념 안에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 가족과 데이트를 하는 것, 거래처와 미팅을 하는 것,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행위가 포함된다고 본다. 즉 카페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변수가 너무 많다.
나는 마감이라는 중요한 사명을 안고 그란데 사이즈 커피를 시켜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체력 넘치는 2세 아기가 앉을 수도 있고 유난히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커플이 앉을 수도 있고 오랜만에 만나 3시간이 넘는 이야기가 필요한 남자 친구들이 앉을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시간을 보내러 갔고,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보내러 왔다. 모두가 값을 지불하고 일정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이니 너무 큰소리를 내거나 불편한 행위를 하면 주의를 받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내가 마감을 해야 해서 옆자리에 앉은 이들이 소곤거리는 배려는 할 수 있어도, 그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니 마감을 하려거든 얌전히 집에 있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스터디’ 카페에 가는 것이 옳다. 기분 전환을 하고 약간의 추진력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집 책상에는 나만의 방식을 따라 배치된 각종 장비들이 있다. 듀얼 모니터, 손목 보호 쿠션, 블루투스 키보드 등. 그 외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시력 보호 안경과 립밤, 티슈, 텀블러, 미스트, 펜과 메모지가 있다. 카페에 나가려면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엄선해 가방에 담아야 한다. 노트북이든 아이패드든 둘 중 하나는 당연히 가져가야 하므로 가방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노트북이라면 어댑터를, 아이패드라면 충전기를 챙겨 가야 한다. 레퍼런스가 꼭 필요한 작업이라면 책도 최소 1권은 가져가야 한다. 여기에 요즘처럼 날씨가 더우면 카페에서 걸칠 얇은 긴팔이 필수고 다시 찾아온 코로나의 위협은 피하면서 추가 할인을 얻고 싶다면 텀블러도 넣어야 한다. 기본 휴대 물품인 카드 지갑과 무선 이어폰, 핸드크림 등을 넣은 파우치도 필요하다. 돈을 더 쓰기 싫으니 소소한 간식도 넣어야겠다. 이렇게 완성된 ‘카페용 가마니’를 지고 갔다 돌아온 날이면 왼쪽 어깨에 선명한 자국이 남아 최소 이틀은 사라지지 않는다.
카페에서의 분위기 있는 작업을 위해 듀얼 모니터를 포기해야 하는 것도 꽤나 고역이다. 최근에는 A작업본에 있는 내용의 다수가 B작업본에 중복되어서, 이를 바탕화면에 다중창으로 띄워 일일이 확인하다가 15인치 노트북 속으로 빨려 들어갈 뻔했다. 듀얼 모니터라면 다중창이라도 내용이 크게 보이니까 그나마 답답한 속이 좀 뚫리는데 카페에선 이게 불가능하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노트북 키보드도 잘 못 쓰겠다. 맨바닥에 타이핑하는 기분이 드는데, 그렇다고 노트북에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챙겨 나가기엔 힘에 부친다. 요즘 사람들은 노트북 거치대도 들고 다니던데… 게다가 작업을 더해야겠는데 콘센트나 USB 포트가 없는 자리에 앉으면 초조하다. 배터리는 줄어드는 데다 엉덩이를 붙인 지 2시간이 넘었는데도 작업이 끝나지 않아 집에서 이어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때. 그때의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맙소사. 역시 집에 있는 게 낫다.
아는 중국어 번역가는 더 이상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한자는 획 하나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까딱하다가 오역을 낼 수 있어 큰 화면으로 글자를 크게 봐야 하기 때문이란다. 다른 번역가는 버티컬 마우스에 키보드의 가운데가 벌어져 있는, 손목 및 어깨 보호용 키보드를 쓰고 있어서 더더욱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음. 카페는 역시 다이어리나 책 한 권만, 또는 영화 보기용 태블릿 하나에 맛있는 디저트를 곁들이는 것이 최고일지도. 향긋한 커피 한잔에 우아하게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지는 못하지만 먹고 싶은 만큼 커피를 내리고 원하는 만큼 얼음을 잔뜩 넣어 마시는 ‘홈카페’도 훌륭하니, 나를 포함한 일부 프리랜서들은 당분간―어쩌면 꽤 오래―카페에서 일을 못하지 않을까 싶다.
정재이
번역가 겸 작가
저서: <2년 만에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