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아 맞다, 마스크 안 가져왔다!’
요즘처럼 마스크가 얼굴의 일부인 시기도 없는데 어쩌다 그걸 빠뜨렸는지 모르겠다. 진짜 어쩌다 그랬을까? 어제 급하게 짐을 싸다가… 아, 침대에 누웠더니 마스크가 생각나서 내일 아침에 꼭 챙겨 넣어야지 라고 생각하곤 신나게 뛰쳐나갔구나. 집에 마스크 많은데… 쓸데없이 돈 쓰게 생겼네. 아이 진짜. 도착해서 공항 편의점부터 들르지 뭐. 이미 좌석 벨트 맸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일단 눈부터 감자. zzz.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평온한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평온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고민하고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다. 가만히 앉아 현재를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가끔 약속에 늦었을 때도 이런 평온함을 경험한다. 당연히 상대의 얼굴을 보기 전과 본 후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달리고 있는 전철과 버스를 재촉할 수 없는 노릇이니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을 한 번 더 꼼꼼히 찾아보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아 버린다. 이런 순간에는 결심과 선택이 빨라져서 차라리 좋은 것 같다. 어떻게 해야 가장 나은지 갈팡질팡할 필요가 없다. 선택지도 적고 명확하다. 어쩌면 생각이 많은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늦은 날에는 폭주 기관차 같던 버스 기사님도 아주 여유롭게 운전을 하시더라!)
사람을 향한 마음에도 이런 적은 선택지의 효율성이 발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친구를 망설임 없이 더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때론 그 친구를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몸을 기대고 눈을 감듯, 빠르게 결정하고 빠르게 선택하고 싶다. 이렇게 행동하면 마음이 커지지 않을까, 저렇게 하면 내 마음을 오해하지는 않을까, 아직 난 그 정도로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네가 착각하지는 않을까 고민이 된다. 나에게 남은 상처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면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고민 끝에 말을 삼키고 마음을 삼킨다. 속이 불편하니 자꾸만 화장실에 가게 되고, 피부에는 약을 바르고, 밤에는 두 발을 뻗어도 잠에 들지 못한다. 때론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서 답답하다. 괜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무리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질답을 해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어떤 말과 선택이 후회를 덜 남기는 걸까. 이런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별로다.
1시간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짐 찾는 곳으로 여행 가방을 찾으러 갔더니 다른 비행기 수하물이 먼저 나오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앞에 선 사람들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하고 여기에 서면 짐이 더 잘 보일까 싶어 내가 찜해 둔 작은 시야의 틈새마저 본인들의 뒤통수로 촘촘히 메웠다. 시계를 보니 곧 렌터카 업체 셔틀버스가 오는 시간이다. 내 짐에는 항공사에서 붙여 준 ‘우선 처리’ 딱지가 있는데도 나오질 않는다. 마스크도 사야 하는데. 나도 급하다. 그러나 어찌한담. 짐이 안 나오는 걸. 짐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조금 아쉽게 셔틀버스를 놓쳤지만 마스크를 살 수 있었고, 가고 싶었던 국숫집은 갈 수 없게 되었지만 새로운 맛집을 발견했다. 삶은 무엇이든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연속이라더니,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