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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Sep 30. 2022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좋다

제주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아 맞다, 마스크 안 가져왔다!’


요즘처럼 마스크가 얼굴의 일부인 시기도 없는데 어쩌다 그걸 빠뜨렸는지 모르겠다. 진짜 어쩌다 그랬을까? 어제 급하게 짐을 싸다가… 아, 침대에 누웠더니 마스크가 생각나서 내일 아침에 꼭 챙겨 넣어야지 라고 생각하곤 신나게 뛰쳐나갔구나. 집에 마스크 많은데… 쓸데없이 돈 쓰게 생겼네. 아이 진짜. 도착해서 공항 편의점부터 들르지 뭐. 이미 좌석 벨트 맸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일단 눈부터 감자. zzz.


아무것도  수가 없는데 평온한 때가 있다. 아무것도  수가 없어서 평온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고민하고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다. 가만히 앉아 현재를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가끔 약속에 늦었을 때도 이런 평온함을 경험한다. 당연히 상대의 얼굴을 보기 전과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달리고 있는 전철과 버스를 재촉할  없는 노릇이니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을    꼼꼼히 찾아보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아 버린다. 이런 순간에는 결심과 선택이 빨라져서 차라리 좋은  같다. 어떻게 해야 가장 나은지 갈팡질팡할 필요가 없다. 선택지도 적고 명확하다. 어쩌면 생각이 많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있다.(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늦은 날에는 폭주 기관차 같던 버스 기사님도 아주 여유롭게 운전을 하시더라!)



사람을 향한 마음에도 이런 적은 선택지의 효율성이 발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를 망설임 없이  사랑할  있었으면 좋겠고 때론  친구를 마음껏 미워할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없어 몸을 기대고 눈을 감듯, 빠르게 결정하고 빠르게 선택하고 싶다. 이렇게 행동하면 마음이 커지지 않을까, 저렇게 하면  마음을 오해하지는 않을까, 아직   정도로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네가 착각하지는 않을까 고민이 된다. 나에게 남은 상처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면 성숙한 사람이   없으니까 고민 끝에 말을 삼키고 마음을 삼킨다. 속이 불편하니 자꾸만 화장실에 가게 되고, 피부에는 약을 바르고, 밤에는  발을 뻗어도 잠에 들지 못한다. 때론 나도  마음을 모르겠어서 답답하다. 괜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무리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질답을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어떤 말과 선택이 후회를  남기는 걸까. 이런 이유로 아무것도   없는 것은 별로다.



1시간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짐 찾는 곳으로 여행 가방을 찾으러 갔더니 다른 비행기 수하물이 먼저 나오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앞에 선 사람들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하고 여기에 서면 짐이 더 잘 보일까 싶어 내가 찜해 둔 작은 시야의 틈새마저 본인들의 뒤통수로 촘촘히 메웠다. 시계를 보니 곧 렌터카 업체 셔틀버스가 오는 시간이다. 내 짐에는 항공사에서 붙여 준 ‘우선 처리’ 딱지가 있는데도 나오질 않는다. 마스크도 사야 하는데. 나도 급하다. 그러나 어찌한담. 짐이 안 나오는 걸. 짐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조금 아쉽게 셔틀버스를 놓쳤지만 마스크를 살 수 있었고, 가고 싶었던 국숫집은 갈 수 없게 되었지만 새로운 맛집을 발견했다. 삶은 무엇이든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연속이라더니,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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