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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Dec 08. 2022

일로서의 번역

돈을 받고 번역하는 일의 중압감은 유쾌한 것이 아니다. 눈의 수분을 메마르게 하고 허리를 뻐근하게 하고 뱃살은 두툼하게 만들면서 몸 전체의 근육은 말랑하게 한다. 현관문 앞에는 뜯지 못한 택배가 쌓이고 바닥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이지만, 밖으로 나가질 않으니 택배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슬리퍼를 신고 있으니 먼지는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할 뿐이다. 어느 날은 이런 풍경을 보고도 '허허허' 실실거리는 반면 어느 날은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삶이 있냐며 화를 낸다. 때로는 그냥 닥친다. 화를 내는 데 에너지를 사용할 만큼 체력을 낭비할 수 없어서 그렇다.




번역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져도, 참는다. 글을 옮기던 도중이었기 때문에 최소 하던 것은 마저 다 하고 다른 일을 하자는 생각이다. 상황상 옳은 선택을 했지만 예상 외로 번역에는 속도가 붙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종이에 옮기고 싶은 이러저러한 문장들이 떠오르지만 결정을 번복했다간 마감이 늦어질 게 뻔하다. 마침내 일을 다 하고, 저녁 밥까지 먹고, 샤워를 하고, 이제 글을 써 볼까 하니 기가 막히게 괜찮았던 문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뭐 이런... 생각해보니 지난 주와 이번 주 주말 약속도 모두 취소했고, 읽고 싶어 빌려온 책은 이제 겨우 한 장 폈는데 내일이 도서관 반납 예정일이란다. 일로서의 번역은 하고 싶은 일을 참고 미루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다. 계급장은 필요 없다. 온전히 나의 이름 석 자를 건다. 출간하기에 부족함 없는 원고를 인도한다는 조항에 부응하고 한 번 써둔 글로 평생을 평가받는 일이다. 하나의 옮긴 작품이 다른 작품과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무섭다. 그 작품들이 어떤 의미에서 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나는 아니라서, 구글이 나를 이런 식으로 기억하게 두어도 좋을지 모르겠다('Google never forgets(구글은 절대 잊지 않는다).' 드라마 <애나 만들기>에 나오는 대사다). 그리고 이 압박을 아는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드물다.




수많은 마감을 지나왔지만 앞으로도 많은 마감이 기다리고 있다. 올해도 마감과 함께 일 년을 맺는다. 상담사에게 스트레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기쁨을 찾으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미 좋은 문장들을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글을 쓰기로 했다. 또 창고에 있던 작은 조명을 꺼내 침대 맡에 두었다. 나는 따뜻한 주황빛 조명을 좋아한다. 내면에서 기쁨이 차오르지 않는다면 때론 이렇게 밖에서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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