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소통자가 느낀 번역가를 향한 표정, 그리고 시선(2)
올해로 1년째 연을 맺고 있는 분이 있다. 우리는 SNS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됐는데, 각자의 이름과 직함 정도만 아는 사이다. 그리고 작업을 요청하고 수락할 때만 이야기를 나눈다.
월말쯤 고정적으로 진행하는 작업이 있어서 한 달을 마무리하는 시기가 되면 이메일이든 전화로든 그에게 연락이 온다. 사실 이메일로 연락이 오면 고정적으로 진행하는 그 작업만 있는 것이고, 전화가 오면 고정적으로 진행하는 그 작업에 더하여 추가 의뢰가 있는 경우다.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다르게 영상과 음성을 듣고 화자의 말을 받아 적어 번역하는 일을 부탁받았고, 이미 해 본 적이 있어서 작업 강도가 버거운 편이란 걸 알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나는 그가 내게 부탁하는 일들이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거절해본 적이 거의 없다. 사실 나는 본 적도 없는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대했다. 개인적으로 사회에서 쉽게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와 일 관련 대화를 하는 것조차 신기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나라는 번역가를 '발견'해 일감을 물어다 주는 그를 언제나 고마운 사람으로 여겼고(물론 지금도!), 가끔 그런 마음은 도를 참지 못하고 흘러넘쳐 과잉 친절을 담은 이메일―'요즘처럼 선선한 날씨에 일교차가 심하여 몸이 성하시진 않을지 걱정되옵니다' 같은―이나 표현―'제게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다니 늘 영광입니다' 같은―을 쓰게 만들었다.
그는 가히 철옹성이었다. 보통은 못 이기는 척 웃어줄 법도 한데, 그의 이메일은 언제나 건조했기에, 나는 이런 말투로 그를 공략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사무적인 편이었다. 통화를 할 때도 메일을 쓸 때도 딱 할 말만. 계절 인사나 명절 인사 같은 건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고 하게 되더라도 간결히 한 줄로 마무리하곤 했다. 그런 말을 할 시간도 없이 바빠서 일 수도 있으나,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해보니 그는 그냥 그런 걸 하지 않는 종류의 사회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비약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일련의 사건과 시간을 거쳐, 나는 내가 그를 거스를 수 없는 갑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감을 받아야 먹고살 수 있는 프리랜서 생활을 완벽한 을로 규정하고 있었기에 그와의 관계에서도 내가 저(低)자세를 취하고 있었단 걸 깨달은 것이다. 한 명의 동료이자 거래처로 온전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은연중 내가 작성한 이메일에서 이런 태도와 분위기가 풍겼을 거란 생각이 들자, 진심마저 과장된 형태로 전달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얼굴로 따지자면 수줍은 미소 뒤 눈치 보는 태도를 숨긴 얼굴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에게 부탁받은 녹취 작업 완성 후, 을이 아닌, 하나의 작업물을 만드는 팀의 동료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이렇게 적었다.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부탁하시는 일들을 한 번도 쉽게 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늘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부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몇 시간 뒤, 그에게 이런 답장이 왔다.
저도 신입 시절 해본 경험이 있는 작업이라,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한눈에 보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늘 든든합니다.
비로소 각자의 모니터 속 이메일 화면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의 얼굴이 편안해졌다는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그의 한마디에 온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분은 나를 든든한 동료로 생각해주는구나. 이분에게 나는 협력자구나. 나의 작업이 분명하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앞서 말했듯 그는 바빠서 미치겠을 때 혹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일 때 추가 의뢰를 하려고 내게 전화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누구보다 신사적이다. 자신이 밤을 새워서 검토를 할지언정 번역가에게 빨리 작업물을 내놓으라 닦달하지 않는다(평소보다 타이트한 데드라인을 제시하긴 하지만). 그는 매우 조급한 상황일지라도 적국에 침착하게 다가가 협상 카드를 내미는 로맨스 판타지 속 공작 남주를 닮았다. 그러니 그의 손을 잡고 싶어질 수밖에. 이러니 금요일 오후 5시에 1,000단어 작업을 던지듯 줘 놓고선, 주말 일정이 있어서 안 된다 거절하니 방금 1,000단어짜리―즉 소량인데―를 거절한 게 맞냐는 뉘앙스의 메일이, 다짜고짜 찾아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놓곤 이 모욕은 반드시 기억하겠다며 콧수염과 입술을 삐쭉이는 일개 자작으로 보일 수밖에.
한동안 쓰고 있던 원고에 집중하지 못했다. 돈으로 엮인 사이지만 잠시나마 돈 이상의 사이가 된 것 같아서. 단 한 명에게라도 단순한 외주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날의 나를 춤추게 했다.
정재이
번역가 겸 작가
저서: <2년 만에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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