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소통자가 느낀 번역가를 향한 표정, 그리고 시선(1)
주로 이메일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참으로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하곤 한다. 오로지 모니터 속 텍스트로만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왜인지 상대의 얼굴이,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무심하고 저 사람은 매일 웃어 준다. 또 저 사람은 늘 미간이 좁다. 사람마다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문체와 글의 모양이 있기 때문에 나의 경험과 감정만으로 화면 속 얼굴들을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얼굴에서 번역가를 향한 시선이 보인다. 누군가에 번역가는 협력자이고, 누군가에게는 동료이지만 결국엔 외부인이며, 누군가에게는 하청 노동자다.
종종 금요일 늦은 오후쯤 번역 의뢰를 받는다. 마감일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의뢰는 참 얄궂다. 이 의뢰를 수락하면 바로 내일부터 시작될 주말에 작업을 해야 하니까. 게다가 사정이 있어 퇴근 시간 가까울 때까지 회신을 하지 않으면 문자로 일정 확인을 재촉한다―그래야 퇴근 전에 업무 할당하고 집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다른 작업도 있어서 주말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의뢰를 받긴 하지만, 평일, 주말, 공휴일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피부로 느끼게 되니까, 반갑지는 않다.
몇 개월 전 어느 업체에게서 이런 종류의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주말은 이미 종일 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지만, 일을 추가하면 과하게 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작업을 하기 어렵겠다는 내용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20분 뒤, 이런 말이 돌아왔다.
‘1.5K(=1,500단어) 안 되는 작업인데 어려우세요?’
여러 개의 속내가 비치는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나의 거절로 인해 새 외주 번역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난 지금 급하다(한 줄 회신이 모든 걸 말해준다). 이 작업은 소량이다. 주말 이틀 동안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답을 정해 놓은 듯한 작업 요청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는 AI처럼 문장을 입력하면 즉각적으로 옮겨주는 사람이 아니다. 번역가는 작가다. 번역가는 원문을 다시 쓰는 사람이다. 번역가는 번역문의 일부이자 모든 것이며, 프로젝트의 한 요소다. 번역가는 팀의 작업을 함께하는 사람이다. 소량이든 대량이든 마감일이 짧든 길든 일을 던져 주면 군말 없이 주워다 해결하는 사람은 아니다.
안 그래도 유독 이 회사에서 이런 요청을 자주 받았던 터라 궁금하던 참이었다. 다른 곳에서라면 데드라인이 타이트한 점 양해해달라는 말과 함께 부탁받을 만한 일을 이 회사는 평범하게 요청하곤 해서, 작업량 또는 일정 조정을 요청하는 내가 도리어 미안하다는 말을 달아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뜬다. 이 회사의 유난일까, 업계 전체에 이런 태도가 만연한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 회사에 소속된 번역가들은 이러한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주는 걸까, 그리고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조금 이상하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업계 특성상 최종 고객이 급하게 작업을 요청할 때가 있으므로 일정이 급박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며, 내가 그의 급한 사정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나의 급한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사정을 끼워넣었으면 뭔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글쎄, 오히려 그의 태도와 인식이 뚜렷해졌을 거란 쪽으로 무게 추가 기운다.
그에게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일정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소량이라 하더라도 기존 작업 일정에 끼워 넣을 틈이 없어 아쉽지만 다음에 참여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주말 동안 몇 가지의 작업을 해결해야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거기서 말을 그쳤다. 나름대로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호소하고 싶었다. 알겠다는 짤막한 회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는 똑같은 의뢰를 반복했고 나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기에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알겠다는 회신조차 오지 않았다.
정재이
번역가 겸 작가
저서: <2년 만에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눌렀다> - 프리랜서의 삶과 여행의 기억을 담은 일상 회복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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