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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May 17. 2019

저, 오늘 생일이에요

오묘한 그날, 생일에 대한 단상 그리고 추억



1.


일 년에 딱 한 번뿐인 오늘. 우리 집 거실에서 나를 위한 파티가 열린다. 엄마가 아침부터 싸 준 김밥부터 치킨, 피자, 유부초밥, 케이크, 각종 과일이 한 상 거하게 차려지는 날. 이 날을 위해 어제 빳빳한 8절 도화지를 곱게 오려 시간과 날짜와 장소를 적은 초대장까지 만들었다. 나는 그림은 못 그리니까 색종이를 접어 붙이거나 아끼는 스티커를 몇 장 붙여주니 더더욱 그럴 듯하게 완성이 됐다. 그렇다. 오늘은 바로 내 생일. 종이 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와 음식은 잘 차려졌는지, 초대한 친구들의 인원수에 맞게 그릇은 잘 놓여 있는지를 확인하고 식탁 위에 남은 음식을 한두 입 먹어보니 히죽이는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는다. 베란다 밖으로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니 가슴이 들뜬다. 현관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형형색색의 포장지로 뒤덮인 선물을 받아드니 입이 찢어지게 행복하다. 잔뜩 차려진 음식을 기분 좋게 그리고 우아하게 먹고 싶은데 남자애들은 30분 만에 먹고 놀이터에 나가자 아우성이다. 따라 나가봤자 하는 건 고작 자기들 좋아하는 이상한 게임이나 축구면서. TV를 켜거나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꺼내 봐도 반응이 그저 그렇다. 선물을 받고 밥을 먹고 나면 딱히 할 게 없는 건 사실이라 결국 따라 나간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일부 여자애들은 재미가 없으니 들어가자며 난리다. 결국 나간 지 한 시간 만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시끌벅적하던 거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걸 보니 재미가 없다. 엄마는 저쪽에 있는 치킨부터 나르란다. 내가 생각하던 생일 파티는 이게 아닌데. TV에 나오는 것처럼 멋있고, 즐겁고, 애들한테 좀 더 오래 잔뜩 축하받고, 하루종일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떠들썩함이 지속되는 걸 바랐는데. 나도 초등학생이지만, 아직 다들 어려서 수준이 안 맞아서 안 되겠군. 그래도 한쪽에 쌓여 있는 선물을 보니 마음이 풀린다.




2.



시험 기간에 생일을 맞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한국에서 5월은 소풍, 체육 대회, 혹은 축제 준비로 들떠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달이었는데, 미국에 오니 사정이 좀 다르다. 8월 말에 학기가 시작되어 5월 중순에 마치다 보니 4월 말부터 학생들은 학기말 시험을 위해 도서관에 모인다. 밤샘 공부를 한답시고 야식이 범람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내 시험이 끝난다고 해도 친구가 시험이 끝나지 않았으니 놀 사람이 없다. 5일 뒤엔 짐을 싸서 기숙사를 나가야 하고, 기숙사를 나간다는 건 짧은 일 년간의 유학 시절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뜻이라서 겉으론 아닌 척하지만 속으론 씁쓸하다. 어쩌랴. 나는 잠시 왔다 가는 사람이고 이들은 이곳에서의 삶에 충실해야 하니 너무 기대거나 의지하면 안 된다. 아마 이렇게 미국 생활을 하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끝까지 즐겁게 보내다 가고 싶다.

그래도 가장 가깝게 지내던 동생 두 명이 오늘 언니 생일이니까 데이트를 해야겠다며 기숙사를 찾아왔다. 고맙기도 하고 무척 기뻤다. 주어진 한 시간 동안 수수한 유학생 옷장 속에서 가장 화려한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유명하다는 해변도 거닐고, 가보고 싶었던 멕시칸 요리 가게에서 밥도 먹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즐거웠다. 해가 저물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에 동생이 들를 곳이 있어서 잠깐만 같이 가자고 했다. 운전자 편할 대로 하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태국 음식점이었다. 포장해 갈 음식이 있는 걸까 싶어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테이블에 우리 동아리 친구들이 여럿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어쩌다 여기서 다들 같이 밥을 먹고 있지? 의아해하던 찰나 뒤를 돌으니 생일 케이크를 든 친구가 서 있었다. Josie, Happy birthday!

오늘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왈칵 울어 보기는 또 오랜만이라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케이크를 들고 있던 친구는 내가 일 년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남자아이. 울고 있던 내게 생일 축하한다며 가벼운 포옹을 건넸다. 미국에선 특별할 것도 없는 가벼운 허그가 나한테만 주어지는 다정한 선물처럼 느껴져 자꾸만 눈길이 간다. 아이고, 일기가 다른 쪽으로 새어 나갔네. 아무튼, 한국 나이로 스물셋이나 되었는데도 깜짝 파티란 건 여전히 기분이 좋고 고맙고 또 행복하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하신 말이 생각난다. '승연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친구란다. 승연이가 잔뜩 받은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내 인생에 행복한 순간을 선물하기 위해 과제와 시험이 전부인 이 대학생 친구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로 모였다. 나는 돌아가지만, 한 명 한 명 연락도 자주 하고 반드시 기억하며 지내야지. 다들 고마워.



3.



'고객님의 만 나이가 변경됨에 따라 운전자 연령이 다음과 같이 자동 변경됩니다.' - XX 자동차 보험


나이가 들수록 생일이 별 게 아니게 된다. 뭐, 나름 생일이라고 하니 맛있게 한 끼 먹을까 싶다. 저녁에는 다음 주에 납품해야 하는 작업이 있으니 일을 해야 한다. 생일 다음 날인 주말에도 별다른 약속이 없다. 친구에게 만나자고 연락하는 게 나의 특별한 하루를 알아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초등학교 때는 생일이 이 세상에서 나만 주인공이 되는 날인 줄 알았다. 유학 시절에 받았던 깜짝 파티의 추억도 이젠 아련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생일에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크게 섭섭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도 왜인지 평소 안 보던 영화를 볼지 고민하기도 하고, 머리를 새롭게 하고 싶기도 하고, 옷장 속에서 그나마 예쁜 옷을 걸쳐 입고 바람을 쐬러 나가볼까 싶기도 하다. 좀 더 까불어 볼 수 있는 날이라 그런 걸까. 생일은 남이 아닌 내가 나를 소소하게 챙겨주는 날이 되어 간다. 나이 든 부모님께 뭔가를 차려 달라거나 사달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챙겨 달라 말하는 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럼에도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넘기기엔 아쉬운 날. 생일이란 참 이상한 날이다.

얼마 전에 '당신이 아이를 선택하지 않았듯, 아이도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난다.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부모님은 30년 전 오늘, 나를 만났다. 비슷한 듯 매우 다른 두 사람이 분리되는 순간이자 다시금 살을 부대껴가며 살아가야 하는, 중요하고도 이 오묘한 관계가 각자의 취향 반영 없이 시작됐다. 그날 나를 만난 부모님의 기분은 어땠을까.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오늘은 친구와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그리고 나면 얼마 전에 발견한 마카롱 맛집에 가서 테이블에 앉아 마카롱 두 개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잔뜩 누린 후, 미리 포장 주문해 둔 마카롱을 들고 집에 돌아가야지. 아, 그전에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잘라야겠다. 생일이라고 동네 카페에서 무료 음료 쿠폰도 보내줬다. 이건 아껴두었다가 이번 달이 가기 전에 꼭 써야지. 엄마가 그래도 너 먹고 싶은 거 먹고 지나가자고 하길래 냉큼 대형 마트에서 파는 연어 샐러드를 먹고 싶다고 했다. 과연 나이가 들수록 생일이 별 게 아닌 게 맞는 걸까. 소소하게 채워 넣은 할 일들이 왜인지 신나고 재밌는데 말이다. 여전히 내 속에 초등학생 승연이가 살아 숨 쉬나 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일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눈치를 보며 어리광을 피우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짓눌러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슴 한쪽에 있는 가장 어린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이를 먹을 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을 믿고 싶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 가는 게 유쾌하지는 않지만 나를 보듬는 과정이라 믿는다. 한 살 더 먹은 나는 내가 꿈꾸던 어른이 되어 있을까, 궁금하다.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노트북이 하루 먼저 생일 축하해줬어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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