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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Dec 14. 2018

괜찮아요, 어디로 가든 길은 나와요

'말' 시리즈 3 - 나는 생각보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후, 취업을 위해 국가시험을 준비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헛헛하고 속상한 데다 건너 건너 들려오는 취업 소식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시절,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이력서에 ‘운전면허 취득’이란 말이라도 적어야 하지 않겠냐는 부모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바를 하다가 운전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실제로 아는 언니도 운전면허가 있어서 어린이 통학 차량 지원 알바를 며칠하게 돼 소소한 용돈을 벌었다고도 했으니까. 그렇게 나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운전 학원의 세계에 입성했다.

기본예절만 알면 풀 수 있다는 학과시험과(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학원에서 치르는 장내 시험 통과 후, 8시간의 도로 주행 연습 끝에 면허를 취득했다. 나는 남들보다 추가 비용을 내고 도로 주행 연습 시간을 두 시간 늘렸었는데 그게 꽤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충분히 연습했다는 마음에 자신감이 생겼고, 게다가 도로 주행을 했던 시기가 겨울이어서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 위도 달려 봤고 비로 흠뻑 젖은 도로 위를 달려 보기도 했다. 면허를 딴 후 혼자 그런 도로를 달려야 했다면 더욱더 두렵게 느껴졌을 텐데 한 번이라도 학원 강사님을 옆에 태운 채 여러 조언을 들으며 운전을 해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성함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용감하게 나와 함께 달려 주신 강사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면허가 생겼으니 멋진 차가 덤으로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술 한잔 하신 아빠를 대신해 차를 몰아 볼 기회가 있을까 싶었으나 아빠는 보험을 안 들어 놨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했다. 또 면허를 취득한 뒤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직장에 취업하게 되어 굳이 차를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을 버스로 통근하다 조금 더 먼 거리의 신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버스도 전철도 잘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매우 곤혹스러웠다. 버스 한 대만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직장을 버스-지하철-버스로 환승을 해야 하니 금세 체력이 바닥이 났고 40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놓치면 집에 갈 수가 없어 함께 근무하던 야간 당직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 밖을 질주하듯 뛰쳐나가야 했다.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부모님과 함께 상의 후 3년 간 벌었던 돈을 모아 차를 한 대 구입했는데,문제는 신분증으로만 쓰이던 장롱면허 탈출을 위해 다시 운전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해 버린 것이다. 뭐 어쩌겠나. 차는 구입했고, 2주 뒤 출고되고, 출근은 해야겠으니 부딪히는 수밖에. 장롱면허 탈출 코스 등록 후 일을 쉬는 주말마다 운전 연습을 했는데, 학원 강사가 노란 교육용 차를 타고 집 근처까지 오면 내가 운전대를 잡고 직장 출퇴근 길을 함께 달리며 연습에 매진했다.

정말, 차선 변경부터 주차까지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으나 운전 감각이 꽤 괜찮은 편이라 빠르게 기술(?)을 습득해 나갔다. 하지만 강사들도 각자의 스케줄이 있는지라 겨우 세 번뿐인 장롱면허 탈출 연습마다 다른 강사 아저씨와 운전을 해야 했다. 누구는 빨간 불이 켜질 조짐이 보이면 브레이크를 밟아라, 황색 신호까지는 지나가도 된다, 여기선 이렇게까지 속도 줄이면 뒤에 오는 차가 힘들다 등 한 가지 상황에 각자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 들은 말을 잘 지켜도 새로운 사람에게 지적을 받아야 하니, 말을 잘 듣는 수강생 입장에서도참으로 힘든 교육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연습 날, 여느 때와 같이 직장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교육용 차에는 당연히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내 기억만으로 길을 찾아가야 했다. 사방에 신경 쓸 것투성이다 보니 어쩌다 좌회전해야 할 곳을 지나쳐 크게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헉, 아저씨 어떡해요? 저 방금 좌회전했어야 하는데 지나친 것 같아요!!!”

“음? 아유 괜찮어~ 그냥 달려요. 어디로 가든 길은 다 있기 마련이에요. 괜히 브레이크 밟고 우뚝 서면 사고 나요. 달려요. 길은 여기저기 다 뚫려 있으니 걱정 말아요.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아저씨 말대로 침착하게 이정표를 보며 집 방향으로 달리다 보니 익숙한 건물들이 나타나면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좌회전에 실패해서 강원도라도 가게 된 줄 알았는데 그래봤자 고작 10분 허비했을 뿐이었다. 우려와 달리 나는 크게 잘못하지 않았고 길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일단 당황하고 보는 수강생을 많이 봐 온 강사 아저씨의 노련미가 빛난 순간이었다. 당시 초보 운전자였던 내게 아저씨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우황청심환과 비슷한 존재였다. 운전을 한 지 3년이 넘어가는 지금, 차선을 변경해서 지하차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옆 차선에 있는 차들이 기어코 길을 내주지 않을 땐 그때 그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거기만 길이냐, 신호 기다렸다 가도 갈 수 있다 뭐.' 그리고 간혹 앞길이 보이지 않고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질 때,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며 곱씹어 보곤 한다.

요새 참으로 할 게 많다. 아니 정확히는 해야 할 일도 많고 해 보고 싶지만 아직 구체화 되지 않은 일이 뒤얽혀 며칠 째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오간다. 여기에 동기와 결과까지 예측하려 하니 더더욱 어렵고, 무언가 요청을 받게 될 때면 나한테만 일을 던져 주는 것 같아 마음이 팍팍해지곤 한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하고 고생은 죽어라 하는데 나만 실속 못 차리는 것 같아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든다. 어느 자리에 나갔는데 이야기를 하던 중, 혹자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잘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굳이 힘을 쏟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여러 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답답해질 정도로 고개를 저어댔는데, 그런 행동도 그의 경험에 기반한 것일 테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있던 여러 명은 그래도 도전해 보는 쪽에 한 표를 던졌다. 그는 끝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지만 다수의 의견에 결국 입을 다무는 눈치였다. 그의 현실적인 판단은 분명 옳지만, 조금 돌아가는 일이 수고스러워 보일지라도, 그 과정 속에서 또 다른 배움의 길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물론 틀리지 않고 한 번에 길을 잘 찾아가면 좋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과거 우리의 일상이었고, 또 현재 우리의 일상이며, 앞으로도 우리의 일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결국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길이 펼쳐지는 색다른 경험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의지의 경험이 생길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그 아저씨는 잘 지내실까. 쉬는 시간에 본인의 잘 생긴 아들 사진도 보여 주시곤 했는데, 허허. 분명 그때의 호쾌했던 말투처럼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계시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좋아져서 어디로든 길은 뚫려 있고 잘 연결돼 있기 마련이란 그분의 말에 하루의 위로를 얻는 요즘이다.

신나게 달렸던 어느 뜨거운 여름날의 풍경. 이제는 새해를 향해 힘차게 달려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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