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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Aug 09. 2020

울 때에야 비로소

나를 '나'답게 해 주는 것

소설 번역 강의를 들을 때였다.


다 같이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시대와 분위기를 봐서 이 소설 속에서는 영어 '파더'(Father)를 아빠라고 하는 것보다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에 대한 토론이 오갔다. 선생님은 수강생들이 번역한 문장을 보고 더 다양한 한국어 표현에 도전해 볼 수 있도록 촘촘하게 의견을 주시는 편인데 어린아이의 시각에서는 아빠라 해도 좋고, 아내 입장에서는 그이나 여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러다 문득 가족이 생각나셨는지 아내―선생님의 어머니―를 '어이, 거기'라고 불렀던 돌아가신 본인의 아버지를 예로 드셨다. 선생님은 멋쩍은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거기, 지금 집에 있나?'라고 하시던 아버지 흉내를 내며 이제는 볼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셨고, 결국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셨다. 그리고 다시 씩씩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함께 마주할 수 있을 때, 부를 수 있을 때 아빠라고 많이 불러드리라고. 그 순간, 나는 앞에 서 계신 선생님의 솔직한 일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2015년 개봉작 <인사이드 아웃>을 손에 꼽는다. 등장인물 중에서는 '슬픔이'로 번역된 새드니스(Sadness)를 제일 좋아한다. 기어이 피규어와 노트까지 사게 만든 캐릭터였다. 영화를 볼 때도 귀여운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슬픔이의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슬픔이는 영화 속에서 주요한 존재로 취급받지 못한다. 슬픔이가 기억 구슬을 살짝 만지기라도 하면 구슬 속 기쁘고 행복한 기억들이 슬프고 우울한 추억으로 바뀌어 저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부분에서, 기억 구슬이 행복한 빛을 띠고 있는 이유는, 실의에 빠졌던 주인공이 실컷 울고 슬픔을 흘려보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픈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고, 이렇게 처지는 때일수록 밝게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어물쩍 넘겨 버리면 반드시 탈이 난다. 마음껏 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마음껏 웃을 줄도 안다는 것. 그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슬픔'이는 이러한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옛날에는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맛있는 걸 먹는다거나 잠을 잔다고 대답했다. 잠을 잔다고 대답했던 건 정말 세상을 지금보다 더 몰랐을 때 했던 대답일 것이다. 이렇게 신경 건드리는 일이 많은데 어찌 그걸 다 무시하고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요즘의 내게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하면, 나는 스트레스를 똑바로 마주한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며 곰곰이 내가 화가 나는 이유를 머릿속으로 살펴본다. 이게 잘 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본다. 신기하게도,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유로 내가 화가 났는지,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는 중에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경험을 한다. 감정은 마주해야 하는 것이지 덮어두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책을 한다, 수다를 떤다, 책을 읽는다 등의 도피성 대안을 대답으로 제시하고 싶지 않아서 구태여 '스트레스를 직접 마주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바꿔 말하면 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마주하는 데 울음은 많은 도움이 된다. 억지로 운다는 말이 아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작은 눈물샘을 뚫고 방울이 떨어지려는 순간을 힘들게 참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약한 모습을 보일까 두려워 꽁꽁 싸매는 대신,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를 눈물로 흘려보내고 나면 머릿속이 개운한 동시에 속이 텅 빈 기분이 든다. 작은 공간에 하나부터 열까지 꾹꾹 눌러 담은 것들을 털어 버리고 다시 숫자 영(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끔은 차 안에서, 내 방에서, 엄마 앞에서, 친구 앞에서, 나와 꼭 닮은 영화 속 주인공 앞에서, 또는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나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보고 싶은 이가 찾아왔을 때, 그러다가 어느 날 내 곁을 떠나갈 때, 빨개진 눈과 함께 온몸의 기운을 빼고 나면 묘한 공허함과 만족감이 감돈다. 울음으로 묻어 있던 감정의 얼룩들이 모두 씻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가장 '나 다운 나'를 마주하면 새로운 사고가 시작된다. 나는 때를 놓친 실패자가 아니고,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금부터 내 마음 다해 주변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고, 어느 것을 시작하든지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을, 흘려보낸 눈물로 되찾은 개운한 마음이 알려준다.


나는 내가 된다, 울 때에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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