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어 Oct 25. 2022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

- 측은한 일당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놀이가 있었어. 힘이 센 애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오징어였지. 


오징어를 할 때마다 항상 나는 상대편 애들 손에 밀쳐지고 잡아 끌려서 선 밖으로 넘어가거나 땅바닥에 쓰러졌어.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어. 


그날, 말로만 듣던 일을 처음 해보게 돼 밤잠을 설쳤어. 


열심히 살지 않아 낯선 곳에서 힘든 일을 하게 됐다는 자책감... 

여기저기 이력서를 계속 보내봤자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 일을 계속해야 될지 모른다는 절망감...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에서 밥을 꾸역꾸역 먹다 보니 체할 것 같았어. 차라리 심하게 체해서 일하러 가지 않을 핑계와 명분이 생기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자책감과 불안감과 절망감이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집을 나섰어. 



막상 물류 센터에 도착하니 마음이 편해졌어. 


물품이 담긴 플라스틱 박스 6개를 손으로 잡은 채 질질 밀고, 끌면서 쉴 새 없이 옮겼지. 


금세 마스크가 입김으로 축축해지고, 이마와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 해지더라고. 


군대보다 빡 센 곳이었어. 2시간이 넘도록 숨 돌릴 틈도 없이 자동화 기계처럼 6단짜리 박스를 계속 날랐거든.  


오후 5시조는 저녁 식사 시간이 따로 없어 배 고픈 것까지 참고 일하려니 괜히 화가 나면서 서글퍼졌어. 


기운이 없으니 오징어 놀이를 할 때처럼 6단짜리 박스를 밀고, 끌다가 바닥에 넘어지기도 했지. 


어느새 자정을 넘어 1시가 되어가고 있었어. 날밤을 새 가며 일한 적이 꽤 있지만, 그때는 책상 앞이었거든. 심야에 녹초가 될 만큼 육체노동을 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어. 


열심히 일해 마음이 뿌듯할 줄 알았건만 왠지 내가 낯설게 보였어. 


일당을 받아 미소가 지어질 줄 알았건만 왠지 내가 측은해 보였어.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일했는데, 자꾸만 불행하게 느껴지더라고.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넌 고생을 더 해야 돼' 자책감이 또 밀려왔지만 무시해버렸어. 


행복해질 일을 못한다고 불행해질 일을 하게 되면, 인생이 아닌 연명이 될 테니... 


비록 돈을 조금 늦게 벌더라도 그나마 마음이 안정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나을 테니...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니... 


이전 05화 오마카세 계란 프라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