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감 폐기 처분
비석 치기는 재미도 있지만, 자세가 웃긴 놀이지.
배에 돌을 얹고 걸어갈 때가 압권이야. 돌이 떨어지지 않게 배를 쑥 내민 채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비석으로 다가갔으니까...
내가 군대에서도 팔자걸음을 할 줄은 몰랐어.
말년 휴가 때 포경 수술을 하는 게 관례이자 유행이었거든. 남들 다 하니까 나도 부대 근처에서 수술을 했지.
야매로 싸게 해서인지, 실밥을 푸는데 열흘 이상이 걸려 휴가 때 거의 집에만 있었어.
부대에 복귀해서도 그곳에 무리가 가지 않게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다녔거든.
감기 증세가 밤이 되면 심해지듯 잠을 잘 때쯤 되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어.
야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발기가 되면서 고문을 받는 듯한 고통이 시작되는 거야.
그것이 너무 팽창해서 실밥이 풀어지거나 수술 부위가 터질까 봐 가슴도 조마조마했어.
그럴 때면 스님들이 불경을 읊조리듯 구구단이나 노래 가사를 미친 듯이 중얼거렸어.
"....... 구팔에 칠십 이, 구구 팔십일,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우린 아직 이별이 뭔지 몰라"
그래도 그것이 진정되지 않으면 급히 웃옷을 벗은 후 차가운 벽에 등짝을 갖다 댔지. 그럼, 신기하게도 서서히 안정이 되기 시작했어.
몸의 일부가 제멋대로 발기되듯 불안감도 갑자기 제멋대로 스며들어.
구구단과 노래 가사를 중얼거리고, 차가운 벽에 등짝을 갖다 대도 사라지지 않지. 고통마저 훨씬 심하거든.
몇 년 전, '푸드 포르노'라는 말이 자주 들렸는데, 요즘은 '빈곤 포르노'야.
모금이나 후원을 받으려고 가난을 자극적으로 묘사한 '빈곤 포르노' 광고도 많이 늘어났더라고.
'불행 포르노'라고 해야 할까. 불안감을 떨쳐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은 점점 자극적이 돼.
나만 불행한 것 같고, 미래가 막막해지면서 두려운 기분에 휩싸이지.
불안감은 독하고, 질기고, 야비해. 마음이 약해지면 더 깊이 파고들거든.
비석 치기 할 때처럼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불쑥 찾아와.
유효 기간이라도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희망이라도 품고 견딜 수 있을 테니...
불안감이 일방적으로 유효 기간을 정하는 것을 더 이상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이제 내가 정하고, 유효 기간이 지난 불안감은 과감히 폐기 처분해야겠어.
내가 만만해 보이면, 불안감이 점점 더 심하게 갑질 횡포를 부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