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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Oct 19. 2022

기분을 정기 소독 중입니다

- 지금, 감정 필터 교체 중

1284년, 독일 하멜른에 사는 어린이들이 마을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어.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만들어진 거야. 


독일 아이들이 피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몰려들었다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소독차 소리가 들리면 환장을 했어.


희뿌연 연기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게 너무 신기하고, 신이 났지.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은 재미가 아닌 공포가 .


그때도 그랬어. 결혼 전, 가구 대리점에서 일할 때였거든. 어느 날, 사장이 직원 4명을 불러 세우더니 맥 빠지는 소리를 지껄이더라고.


"오늘이 월급날이지? 내가 지금 돈이 없으니까 며칠만 기다려줘. 미안하니까 이따 저녁에 술 한잔 살게"


나의 첫 직장이었거든. 게다가 일을 시작한 지 두 달밖에 안 됐건만 월급을 나중에 준다는 말을 들으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지.


직원들은 대리점이 문을 닫게 될 것 같다고 수군거렸는데, 순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공포가 몰려왔어.


그날 저녁, 사장을 따라 을지로에 있는 허름한 식당으로 갔어.


술잔이 오고 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사장이 대뜸 나에게 노래 한 곡을 하라고 시키는 거야.


"아, 뭐해? 빨리 안 부르고! 아무 노래나 해, 아무 노래나!"


사장이 재촉해서 그냥 아무 노래나 부르기 시작했지. 민중가요 '바위처럼'이었어.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고, 노동 운동이나 투쟁에 관심도 없었거든. 그런데 이 노래는 왠지 중독성이 강해 언제부터인가 애창곡이 됐어.


사는 게 버거울 때면 이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곤 했어. 그것은 무의식 속의 간절한 외침이었거든. 고달픈 현실에 주저앉지 말고, 맞서자는...


그날도 마음이 심란해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부른 것이었지.



시위나 농성 현장에서 으레 들을 수 있는 노래라 사장과 직원들도 민중가요인 것을 아는듯했어.


사장은 내가 술김에 '왜 월급을 안 주냐? 빨리 달라'고 시위하는 줄 알았는지 웃음기가 사라졌어.


"내가 안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참 야박하네. 지금 내 사정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


그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술잔을 비우고 나가버렸어.


20여 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무의식 중에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라고 흥얼거리곤 해. 나이만 먹었지, 아직 나는 바위가 되지 못했거든.


얼마나 더 큰 시련을 겪고, 얼마나 더 많은 고난을 이겨내야 바위가 될지, 바위가 되면 삶이 불안하지 않을지, 바위가 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희망이 보일지...  


나 대신 바위가 된 것은 불안감이었어. 생명력이 있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고, 단단한 바위가 되더라고.  


그러니 오늘 역시 내일이 불안했고, 지금도 미래가 불안해.


항상 소독차의 희뿌연 연기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곤 해.


또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라고 흥얼거리며 불안에 찌든 감정 필터를 교체해 보고 있어. 


덕분에 마음이 조금 안정되고 생각이 바뀌었어. '꼭 바위가 되어야만 하냐고, 차돌이나 짱돌이 되면 어떠냐고...' 


우선 불안감을 향해 돌직구를 던지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멀리 쫓아버려야겠어. 지금, 감정 필터 교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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