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어 Oct 28. 2022

나는 다시 깍두기가 됐다

- 어느 늦가을밤의 반전 대박

예전에 아이들은 나이가 어린 동생이나 몸이 아픈 친구들을 깍두기라며 놀이에 끼워주었어.


깍두기들이 놀이의 룰을 이해하지 못해서 종종 흐름이 깨지기도 했어.


다방구, 얼음 땡처럼 복잡한 놀이를 할 때 깍두기들은 '밀양 아리랑' 가사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라는 듯 존재감을 팍팍 드러냈지.


그때 누군가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금세 다들 즐거워졌고 행복해졌어.



아이들 세계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깍두기가 아니었는데, 나는 다시 깍두기가 됐어.


일하고 싶은 곳이 많지만, 오라는 곳이 없어서 시어 꼬부라진 깍두기 신세가 된 것이지.


몸도, 마음도, 날씨도 차가워져서인지 오늘, 설렁탕이 엄청 땡기더라고.


설렁탕 맛집에 가서 먹고 싶었지만, 물가가 너무 비싸 마트에서 포장으로 된 것을 사 왔어.


김치 냉장고 안을 뒤적거렸더니 시어 꼬부라진 깍두기가 있더라고.


군내가 나면서 무가 무를 것 같아 먹지 않으려고 하다가 그냥 꺼냈어.


'내가 이력서를 보낸 회사에서도 나를 이렇게 취급하겠구나'

'내가 정성껏 쓴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바로 버리겠구나'

'나의 노력과 정성은 부질없는 것이구나'


그렇게 씁쓸한 생각이 들었거든.


시어 꼬부라진 깍두기에 감정 이입이 되고, 동질감을 느껴 마지못해 먹었는데...


반전 대박!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부어서 먹자 의외로 맛있는 거야.


숟가락으로 설렁탕 국물을 떠먹다가 나중에는 그릇을 통째로 들고 후루룩, 후루룩 마셨어.


시어 꼬부라진 깍두기 덕분에 기분이 좋아질 줄이야...


"이 깍두기로 볶음밥을 해 먹어도 맛있겠네. 스팸도 썰어 넣고..."


또 해 먹을 음식이 없을까를 생각하는 사이에 기운이 났어.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도 사그라들었지.


시어 꼬부라진 깍두기가 고맙고, 기특하게 느껴졌어. 사람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라 깍두기가 더 친근한, 어느 늦가을밤이었어. 


이전 02화 기분을 정기 소독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