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상낙원 주소

by 모어

나 이 약 먹으면 졸리지 않아요?

약사 요즘 나오는 약들은 안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 약 드시고 졸리면 운전하지 마세요.


감기에 자주 안 걸리는 편인데, 한 번 걸리면 증상이 심하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2, 3주가 지날 때까지 낫지를 않는다.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나오는 건 참을만하다. 몸이 나른하거나 으슬으슬 추운 게 고달프다. 손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 상황에서 일이 밀려 있으면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날은 시간이 얼마나 더디게 가고, 하루가 긴지...



“몸이 아픈 날, 힘겹게 집을 나서서 출근하는 것은 오직 몸뿐이다. 마음은 이미 퇴근해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쉬는 날, 몸이 나른하고 으슬으슬 추우면 오히려 감기 바이러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 감기약을 먹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 낮잠을 한숨 자려고 이불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지상 낙원이 된다. 약 기운에 잠이 몰려오면서 스르르 눈이 감기면 택배 기사가 수레를 끄는 소리와 두부 장수가 울려대는 종소리도 자장가처럼 아련하게 들린다. 그 순간,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나른해도 감성은 쉴 새 없이 꿈틀댄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단잠에 빠지려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낮술을 마셨는지 친구가 들뜬 목소리로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건성건성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는데 전화벨이 또 울린다. 미간을 찌푸리고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아내다. 마트에서 과일과 반찬거리를 잔뜩 샀으니 차 끌고 지금 나오란다. "감기약 먹고 졸음이 몰려와서 운전하면 위험하다"라고 둘러댔는데 막무가내다. 귀에 익은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온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조금 전 이불속에서 꿈틀댄 감성의 여운만은 그래도 이어진다.


- 지상 낙원 주소는 우리 집... 안방... 침대 속... 내비게이션 ‘도로명 주소’로는 검색 불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 다행이야, 유치해서...